잠 못 드는 밤의 사유 II

: 선천성 슬픔

by 드작 Mulgogi

1) 감정에도 주류가 있다면 내 감정의 주류는 선천성 슬픔이라 칭하고 싶다. 이 새벽 어떤 이의 선곡이 부단한 음악적 갈증과 다소 음악 부심이 있는 내가 아는 뮤지션이라 반가운 마음도 잠시. 이윽고 방안 가득 울려 퍼지는 공허한 목소리의 향연은 마치 ㅡ지금 술을 마시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ㅡ 입안 가득 피어오르는 위스키처럼 달콤 쌉싸름하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 음악을 듣다 나도 모르게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그 해 겨울 명동. 쇼트컷을 한 여자가 탄 빨간색 광역 버스가 교차로를 우회전할 때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던 것과 흡사하다. 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고 해거름에 달리는 버스 안의 여자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아오이가 흐느낄 때처럼 울고 있었다. 준세이가 사무치게 그리워 울던 아오이처럼 누군가 사무치게 그리울 땐 그렇게 울게 되나 보다. 그해 겨울 종로. 환하게 타오르던 해바라기의 웃음 뒤에 서린 슬픔을 기억한다. 비가 올 때 유리창에 미끄러지는 빗방울과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던 여자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오버 랩 된다. 이 새벽 전 세계를 떠도는 슬픔이 유령처럼 밀려온다. 유령은 나의 눈물을. 나의 눈은 서가에 꽂힌 책을 그리고 나의 기억은 과거를 훔친다. 그리고 시간은 이 모든 것을 훔치고 감정을 덤덤하게 만든다.


*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여러 등장인물들에게 자신의 여러 인격을 부여하여 소설을 썼는데 각기 다르게 묘사된 위의 세 여자는 모두 같은 하나.


2) 고해 : 오래된 노래
가끔 난감할 때가 있다. 방금 전만 해도 ㅡ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기에 지금은 몇 시간 전만 해도 가을 햇살이 뺨을 스치기만 해도 눈물이 주룩 흐를 듯 슬펐다. 그런데 영감을 받아 이 감정을 글로 쓰다 보니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깨달음에 이상한 죄책감에 휩싸인다. 슬플 때 쓴 글을 슬프지 않을 때 올리는 건 김동률의 <오래된 노래> 같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해 누군가를 두 번 울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스스로 처방을 내린다. 슬프지 않은 게 아니라 눈물과 호르몬을 흘려보내 감정에 항체가 생겼고 이는 슬픔을 중화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그도 그럴 것이 행복하다고 슬프지 않은 게 아니고 슬프다 하여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니까.


3) 생의 숙제

낮에 그레고리 포터의 신곡 If love is overrated 듣고 느낀 감정과 저녁에 영화 <뷰티 인사이드> 대본을 읽으며 잔잔히 스며들던 먹먹함. 그리고 새벽에 섹후땡의 Cry 들으며 아스라이 느낀 감정의 공통분모가 그렇다. 대개 슬픈 건 아름답기 마련이고 아름다운 건 너무 빨리 사라진다. 여전히 풀지 못한 생의 숙제는 어렵다.


4) 선천성 슬픔

선천성 슬픔을 타고난 사람이 후천성 슬픔으로 깊은 절망에 빠진 사람을 만났다. 선천성 슬픔을 타고난 사람은 애초에 세상과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슬픔을 슬픔이라 부르지 않을뿐더러 예삿일 정도로 여긴다. 슬픔을 감내하는 시간도 담담히 받아넘긴다.


반면, 후천성 슬픔을 가진 사람은 전에 없던 슬픔으로 인해 절규하고 절망한다.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상실에 슬픔이 지나가는 시간을 감내할 인내심은커녕 원망스럽다 여긴다. 선천성 슬픔을 타고난 사람이 낙천적일 수 있는 것과 후천성 슬픔을 지닌 사람이 더욱 비관적일 수 있는 일. 전자는 세상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주어진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살고자 함이고, 후자는 여태껏 주어졌던 자신의 삶의 가장 큰 기쁨을 빼앗아 간 운명에 대적하며 원망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난, 선천성 슬픔을 타고난 사람이라 다행이다.


슬픔이 따뜻해봤자 라고 하지만 슬픔은 힘이 강하다. 따뜻함이 묻은 슬픔은 사람을 살게 한다. 내가 그랬듯. 네가 그랬듯. 누구나 불안하지 않고 고통 없는 사람은 없을 터인데, 당장 내 앞에 닥친 고통이 지구의 모든 중력이 나를 짓누르듯 무겁게 다가왔다. 드라마 <연애시대>의 대사처럼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5) Mixed Emotion
나의 오늘은 행복하다.

기쁘다고 슬프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슬프다고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언제 또 불안과 고통에 휩싸이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날이 오더라도 나는 또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려 노력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를 아프고 화나고 힘들게 하는 사람보다,

나를 웃게 만드는 사람들의 힘은 생각보다 강해서 또 나를 살아가게 한다.


“ 망설이고, 주저하고, 눈치 보고,

그렇게 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는 겁니다. ㅡ 드라마, <연애시대> 中 "


슬플 땐 달리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