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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May 18. 2020

작고 다정한 마을 O

3년 전 이맘때 우리 가정은 뿌리 채 삶의 터전을 옮겼다. 숨 쉴 틈 없이 돌아가는 한국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진국 씨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직업적인 회의감에 가득 차 있었다.
2014년 한 달간 하와이 생활이 시발점이 되었고, 그 이후로 몇 가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는데, 셋째의 탄생과 진국씨가 몸담고 있던 스타트업이 헐값에 넘어가는 일이 그것이었다. 미세먼지는 동남쪽에 위치한 도시에까지 손아귀를 뻗어 왔고, 아이들이 놀 장소는 점점 키즈카페로 국한되어 갔다. 당시 아이들 교육에 대한 고민도 깊었는데, 그 대안으로 생각하던 홈스쿨링은 진국씨와 같은 업무시간을 가진 아빠를 둔 가정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2016년 7월 진국씨는 결단했다. 그리고 그의 최대 장점인 자신감으로 유럽 이민을 추진했다. 외국에 어학연수 한 번 다녀온 적 없던 그가 영어로 수백 통의 지원서를 제출하고 답이 오는 대로 인터뷰를 봤다. 그의 그 실행에 박차를 가하게 해 준 것은 뜻밖의 오해였다. 시험 삼아 넣어본 지원서에 독일의 유명 자동차 회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것을 지원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진국씨는 그 일말의 가능성을 붙잡고 달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메일은 지원서가 접수되었다는 자동 메일이었다고 한다. 자동메일 시스템이 우리를 이곳까지 오게 한 건지도...


처음 진국씨가 제의를 받은 곳은 핀란드였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핀란드 교육에 대한(핀란드 하면 교육이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핀란드의 삶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고, 아이들이 잠든 시간 핀란드어 학습 채널을 살짜쿵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거, 핀란드어라는 거, 정말 생뚱맞게만 들렸다. 이런 게 말이라고? 휘바 휘바, 만 알아듣겠네..


백야와 북유럽의 겨울, 한국인 이민자 수 몇 백만이 아닌 몇 백 명인 곳에서 과연 아내가 적응할 수 있을까, 사례들을 살펴보며 걱정하던 진국씨는 때마침 독일에서 입사 제안을 받게 된다.
까마득하여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긴 했지만 진국씨도 나도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다. 축구의 나라, 자동차의 나라, 메르켈의 나라, 독일은 핀란드보다 훨씬 친근했고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지인, 독일에 먼저 이민 생활 중인 지인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고민의 이유가 없었다. 입사 시기에 맞춰 진국씨는 먼저 독일로 날아가서 집을 구하고 뿌리내릴 터를 고르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집 구하기는 악명이 높은데 남자아이가 셋이나 있는 아시아인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악조건이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다녀준 독일인 동료 덕분인지 타고난 복인지 넘치는 자신감과 에너지의 결과인지 그는 한 달 만에 회사로부터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O라는 마을에 아름다운 집을 구했다. 몇 주가 될지 몇 달이 될지 몰랐던 생이별 기간은 깔끔하게 한 달 이내로 마무리되었다. 첫 만남에 주인아주머니는 "한국인도 없는 시골마을에서 너희 아내가 행복하겠니?"라는 질문을 던지셨는데, 그 한마디가 진국씨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고, '우리의 행복을 걱정해 주는 주인'이라는 첫인상으로 O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플레이팅

주인아주머니만 따뜻한 것은 아니었다. O는 시골 마을답게 사람들이 순박하고 정겨웠다. 형의 이민을 돕기 위해 독일까지 와 준 동생과 함께 남편이 처음으로 간 식당에서는 "Welcome to O"라는 글로 낯선 동양인들의 입성을 반겨주었고, 우리 가족이 모두 들어오고 난 후 옆집 젊은 부부는 작은 와인에 그만큼 깜찍한 리본을 달아 첫인사를 와 주었다.

귀여운 와인, 그보다 깜찍한 리본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이사를 다녀온 이유로 고향에 대한 로망이 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들, 골목길을 걸으며 익숙한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 차곡차곡 쌓아온 추억과 그것을 잘 간직한 마을 구석구석. 하지만 떠돌이 인생에 그런 장소는 환상 속에나 존재했고, 대신 아주 독특했던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나름 마음의 고향이었는데,


어쩌면 이 마을, 우리 아이들의 고향이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202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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