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꿈이야
민트의 잉태는 어찌 보면 내 개인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20대의 끄트머리로 향해 가던 즈음에 나는 두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1. 다음 연애는 무조건 결혼으로 연결한다.
2. 서른이 되기 전에 첫 아이를 낳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이런 뜬금없는 목표를 세웠나 싶기도 하지만, 내가 20대였던 때만 해도 결혼과 출산은 인생의 과업에서 옵션이 아니라 필수 항목이었기에, 직업적 전문성에 그다지 진척이 없던 와중 결혼과 출산을 먼저 해 치우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직업적 성취와 상관없이 어릴 때부터 빨리 결혼해서 빨리 아이를 갖고 싶어 하긴 했다. 부모님이 행복하기만 한 결혼생활을 본보기로 보여 주신 것도 아닌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무조건 행복할 것이라 과신하고 있었다. 아이는 나에게 행복만을 선물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민트를 가졌다. 결혼과 출산을 동시에 해결할 나름의 묘수였는데(이러한 속내는 아마 남편도 이 글을 통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게 그렇게 맘먹는 순간 덜컥 이루어질 줄은 사실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자충수일지는 정말,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임신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 현상에 대한 실체적 질감이 나한테는 없었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보다는 누군가의 환상, 동화, 이야기 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여겨졌는데, 실상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어떤 사건보다 더 살과 피의 생생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한편으론 당황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좀 험난한 길로 들어서긴 했지만, 계획대로 되겠다 싶어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민트를 내 인생 목표를 위해 철저히 이용한 것처럼 비친다. 이렇게까지 써 놓고 변명을 해 보자면, 나는 작은 인간들을 사랑한다. 내가 작은 인간이었을 때부터 나보다 작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저 작은 신체가 성인이 기능하는 거의 모든 것을 해 낸다는 것이 놀랍고 아름다웠다. 남편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에 그도 아이를 좋아한다는 점이 있었다. 그래서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도 전부터 함께 우리가 낳고, 키울 아이들에 대한 꿈을 나눴다. 어른이 된 나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이 될 무렵부터(이를테면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나는 민트를 꿈꾸었고, 마침내 그 꿈에 한발 다가간 것이다.
임신 중 결혼은 생각만큼 험난하진 않았고,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남편과 나는 지방의 작은 투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 당시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에 겨워 가질 수 없는 것, 누릴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만, 우리 집에 놀러 왔던 친구가 집은 좁고, 열악하고, 세 가족의 살림살이가 너무 단출하여 마음이 아팠단 소리를 나중에서야 했다. 그나마도 지방이라 누릴 수 있었던 호사였다. 짧은 사회생활로 내가 모은 돈은 거의 없었고, 남편도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막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던 때였다.
가진 것 이라곤 사랑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순산했다. 그것이 내가 서른 전에 아이를 낳고자 한 이유 중 하나였다. 젊고 건강할 때,라는 조건은 순산의 비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임신 초기에 메슥거리는 정도의 입덧을 지났고, 뜻밖의 임신성 당뇨를 진단받고, 입원까지 하고, 부풀어 오른 배에 인슐린 주사를 스스로 꽂아야 하긴 했다. 그래도 예정일 두 달 전, 지역의 명산(동네 뒷산 느낌은 아니고, 고도나 산세도 꽤나 난이도가 있는)에 등산을 하고도 멀쩡할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전반적으로 건강으로 충만한 느낌의 임신 기간이었다.
민트의 예정일은 5월 1일.
참 아름다운 계절에 나는 엄마가 될 예정이었다. 막달이 되어 언제쯤 아이가 나올까 이제나 저제나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진통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며 지나온 평온한 날들이었다.
어느 날 새벽, 문득 잠에서 깬 나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기다려왔던 진통은 아니었고, 아래로 물 같은 것이 왈칵 쏟아졌다. 남편을 깨우고 간단히 씻고, 사뒀던 바게트 빵을 물어뜯으며, 검진받던 동네 산부인과로 향했다. 남편은 그날 출장이 예정되어 있어서 나를 병원에 데려다 놓고, 떠날 생각이었다. 사실,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게 무슨 일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터에 그렇게 천하태평으로 슬리퍼를 끌고 병원으로 향했던 것인데, 상황을 설명하자 의료진들은 무척 다급하게 움직였다. 양수가 터졌다고 했다. 양수가 터지면, 감염의 위험 때문에 48시간 내에 분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임신과 출산에 무지했던 나는, 링거로 유도 분만제를 맞고 있으면서도 태평하게 남편에게 급하면 연락한다며 일단 출장지에 가 있으라고 했다. 출장지는 차로 네 시간을 꼬박 달려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남편분 병원에서 기다리셔야 할 거 같다고, 산모님, 오늘 안에 분만하실 것 같다고, 나의 무지를 질책하지 않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셨다. 덕분에 나는 출산의 과정을 남편과 함께 보낼 수 있었고, 남편도 첫 아이의 탄생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분만 유도제를 맞으며 멀쩡히 걸어 다니다(걷는 게 분만을 촉진하는데 좋다고 했다) 간호사님의 호출에 분만실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멀쩡했던 것 치고는 너무 갑작스럽고 강렬한 통증이 찾아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은 훗 날, 갑작스러운 내 비명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도 못하고(그 당시 내가 다니던 병원은 남편이 분만실에 함께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적잖이 당황하고, 걱정했다고 전했다.
진통 시작 후 약 2시간 만에 민트는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냈다. 분만 과정에는 참여할 수 없었지만, 출산 후 아이의 탯줄을 자르고부터 함께 있었던 남편의 증언에 따르면, 고통에 넋을 놓아버린 나는 취한 사람처럼 늘어진 고무줄 마냥 풀린 목소리와 발음으로, "네, 선생님"만 반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잘 닦아서 강보로 싼 민트를 안자마자 몸과 마음의 빛이 딸깍하고 켜졌고, 품에 안긴 실현된 꿈, 첫 아이, 첫 순간, 지금껏 경험해 본 것과 비교가 안 되는 기쁨이 그 공간과 시간을 휘몰아쳐 감싸는 것을 황홀하게 만끽했다.
벚꽃은 졌지만, 흩날리는 꽃기운이 가득하던 봄날의 아침, 오랜 꿈이었던 아이는 내게로 왔다.
사랑스러운 아이가, 가져올 험한 것들을 그때까지는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