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 장애
독일로 넘어오기 전 5개월 정도 민트는 태권도를 배웠다. 유치원에서 특별 수업으로 태권도를 해 본 이야기를 아주 신나게 하기에 관심이 있나 싶었는데, 마침 현관문에 태권도 학원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동네에 태권도 장을 새로 개관했는데, 한 달 체험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유치원 하원차에서 내린 민트와 어린이집에서 데려온 쪼꼬와 유모차에 실어야 하는 마빈까지 모두 끌고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태권도장으로 향했다. 태권도 관장님은 인상 좋은 청년이었다. 자기는 원래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대학원까지 나오고 나서 진로를 고민하다가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할 때 가장 행복했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사범생활을 거쳐 마침내 본인의 도장을 내게 되었다는 간략 하지만 독특한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민트도 나도 흥미롭게 들었고, 보통은 "용인대"가 붙어 있는 태권도 도장을 많이 가지만 용인대 태권도 학과를 나오지 않은, 수학을 좋아하는 관장님도 여섯 살 아이에게는 충분하겠다는 판단하에 첫날 등록을 결심했다. 게다가 한 달 무료체험이라는 매력적인 제안과 걸어갈 수 있는 거리란 거부할 수 없는 조건 아닌가. 새로 지은 건물에 들어온 태권도장은 신장개업(?) 집답게 예쁘게 단장되어 있었지만, 아직 관원들이 채워지지 않아 썰렁했다. 한 달 체험이라지만 관원 후보인 민트의 등장은 관장님에게도 기쁜 소식이었으리라. 그리하여 동네 태권도장 초기 그리고 최연소 멤버가 된 민트!
이미 눈치 채신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쪼꼬 - 둘째/ *마빈 - 셋째, 모두 아들입니다.
태권도장은 민트의 최애 장소, 관장님과 사범님(태권도장은 빠르게 성장해 곧 사범님도 새로 영입해야 할 만큼 많은 아이들이 다니게 되었다)은 단숨에 민트의 최측근(민트 마음의 최측근)이 되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지만, 한국의 학원시스템은 편리하게도 아파트 우리 동 앞에서 태워갔다, 태워다 주는 극강의 통원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마빈이 태어난 후로 기동력이 떨어졌음은 확실했다. 쪼꼬가 걷기 시작한 후로는 우리 셋이 여기저기 다니며 세상구경을 많이 했는데, 마빈을 아기띠로 안거나 유모차에 실어 다니게 될 경우 나의 움직임은 둔해지고, 천방지축 두 아들을 사방이 막혀있지 않은 공간에서 잃어버리지 않고, 데리고 다니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러기에 유치원/학원의 등하원 차량 서비스는 또 하나의 내가 생긴 것과 같은 아주아주 유용하다 못해 아름다운 제도였다. 게다가 태권도 도장을 가고 또 돌아올 때 차 앞에서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과하게 우렁찬 목소리로 "안녕하십니까, 관장님!" "안녕히 가십시오, 관장님!" 하는데, 그게 또 진풍경이라, 또 하나의 재미를 선사하였다. 주말에 하는 영화 보는 프로그램, 풍선 놀이터 프로그램, 함께 가는 놀이동산, 태권도장에서 하는 모든 프로그램을 뭐 하나 빠트리지 않고, 살뜰하게 챙겨가며, 그렇게 민트는 태권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독일 이주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렸을 때, 쪼꼬는 아쉬울 것이 없었고(아쉽다는 게 뭔지나 알았을까 싶다), 마빈은 생각이 있었어도(물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이 안 되고 있었을 테고) 말을 할 수 없었고, 민트는 그야말로 아쉬운 게 너무너무 많았다. 교회도 같이 다녀서 일주일 내내 만나는 유치원 친구들, 유치원은 같이 안 다니지만 한 아파트에 살면서 친해진 여자친구(엄마들끼리 공동육아 해본답시고 아이들을 데리고 이런저런 것을 많이 함께 했었다), 자주는 못 뵈어도 무한한 사랑을 주는 할머니 할아버지, 자기가 좋아하는 아파트 7층 우리 집, 그리고 태극 마크를 심장에 새겨 붉고 푸른 피가 섞여 흐르게 한 태권도장!
민트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해 독일의 좋은 점을 줄줄이 나열해 보았다.
독일에 가면 집에서 막 뛰어다녀도 돼, 민트 방도, 침대도 따로 생길 거야!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을 거야! 참, 거기에도 태권도 학원이 있대, 거기에서도 계속 태권도를 하자!
하지만 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더 해 줄 수 있을까, 그곳의 자연과 교육 환경, 자연스레 습득하게 될 또 하나의 언어, 이런 것들이 아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무엇보다 부모인 우리조차 그곳의 삶이 어떨지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당시 가장 실질적으로 아이를 설득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는 뛰어다닐 수 있는 집과 태권도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을 것이다.
아이는 익숙했던 모든 것과의 이별을 그대로 감각했다. 부모 맘 아프지 않게, 그리 강렬하게 표현하진 않았다. "O가 많이 보고 싶겠다, 관장님이 진짜 진짜 좋은데, 정말 거기도 태권도 있는 거 맞아,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제 잘 못 봐?" 정도의 말을 때때로 하는 정도였다. 하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아렸다. 제일 친한 친구와 하룻밤, 외가댁에서 하루, 친가댁에서 하루, 그렇게 한국 생활에 작별을 고했다. 익숙했던 것들과 이별하고 낯선 곳에서 기초부터 다시 쌓아가야 하는 생활은 아이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우리는 미지의 세상을 향한 두려움과 설렘을 이국행 비행기에 함께 실었다.
남편은 새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기 위한 행정 처리, 자신과 우리 비자 신청과 동시에 집 구하기를 위해 한 달 먼저 독일로 향했다. 집을 구하고 기본적인 세팅이 되자 짠하고 나타나 우리를 독일로 데리고 갔다. 남편의 안내로 도착한 새로운 "우리 집"은 깜깜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나무 울타리로 된 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가서 건물을 끼고돌아 나무로 된 현관문으로 들어갔다. 애들 삼촌과 아빠가 급하게 사들인 가구들을 어느 정도 미리 설치해 둔 덕분에 그래도 나름 사람 사는 집다워 보였다. 우리는 저녁에 가까운 늦은 오후에 독일에 도착했지만,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때라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고, 되돌아가는 비행기표가 없는 탓에 입국 수속도 간단하지 않아, 남편이 진땀을 흘리며 우리 상황을 설명하며, 꽤 긴 시간을 끌고서야 수속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래도 공항 건물을 빠져나왔을 때는 어슴푸레하게나마 빛이 남아 있었는데, 집까지 이동하는 동안 풍경도 시간도 깊은 어둠에 잠식당했다. 사실 어둠뿐만 아니라 피로와 시간과 공간이 뒤엉퀸 혼란한 감각 속에서 어떤 것도 제대로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남편이 떠나기 전 난방을 빵빵하게 해 놓고 간 덕에, 다섯이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덕에, 이민 첫날밤을 온기 속에 포근하고 따스하게 보냈다.
동네에 태권도 학원이 있었던 것은 거의 신의 가호로 여겨질 만큼 우리 가족에겐 큰 행운이었다. 민트의 거의 첫 번째 취미, 그것도 굉장히 열정을 가지고 해 오던 취미생활이었기 때문에, 게다가 태권도(를 이어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꼬셔서 독일까지 넘어왔기 때문에 민트와 가족 구성원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였던 것이다. Twins Taegwondo라고 알파벳으로 쓰여있고, 전단지에 한국어로 "둥쌍이"라고 잘못 표기된 독일의 태권도 학원. 빠르게 급한 것들을 정리하며, 이런저런 부분에 적응되자마자 태권도 학원을 찾아가 봤다. 방문 중이던 삼촌까지 온 가족 출동! 독일에서는 태권도 어떻게 하나 구경도 하고(한국의 품새 태권도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 보였다, 검도, 합기도 등을 합친 운동 같은 느낌?), 이런저런 설명도 듣고, 등록 서류를 받아왔다. 다음 날부터 민트도 함께 훈련에 동참했다. 예상외로 태권도를 다시 시작한 민트는 그다지 폭발적으로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다른 방식으로 자기가 좋아하던 태권도를 배운다는 게 썩 좋기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며칠 보내고 난 뒤, 태권도 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아직은(이라는 단서를 친절함을 곁들여 붙였다) 민트가 태권도를 같이 하긴 힘들 것 같다고.
생각보다 훨씬 이르고, 단호한 피드백이었지만, 남편과 나는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잠시 보면, 민트는 여러 가지로 이상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사범님(일지 관장님 일지..)을 따라 하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다니고, 옆 친구에게 장난을 치고.. 거기다 말까지 못 알아들으니, 전혀 통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태권도 모국에서 나타난 여섯 살 소년은 그렇게 타국의 태권도 학원에서 추방당했다.
민트는 새로운 환경을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는다. 적응을 힘들어하는 다른 아이들처럼 울거나, 그 공간에 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가면 산만하고 부주의한 행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거기에 기이한 행동(표정과 소리와 움직임)이 추가된다.
적응 장애,라고 하기에는 과한 감이 있어 보일 수 있으나, 어쨌든 다른 사람들 눈에 확실히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
아이들은 별 것도 아닌 일(Kicker라고 하는 테이블 축구 게임을 하다가 점수가 낫니 안 낫니로 논쟁이 시작되었나 보다)로 싸움이 붙었다. 그리고 마침 상황을 통제했어야 하는 선생님은 자리에 없었다. 아이들의 싸움은 점점 격해져 몸싸움으로 넘어갔다. 싸우는 도중 T는 뒤로 넘어졌다. 흥분한 민트는 멈추지 않았다. 민트의 행동은 미필적고의로 간주되었다. T의 엄마가 내게 전화한 이유는 나와 민트가 바짝 엎드리길 바라서였다. 억울하기만 한 민트는 사과 따위를 할 생각이 없었다. 나도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좀 더 확실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즉각적인 사과보다는 민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말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생각해 보면 상대 아이가 다쳤다고 하니, 놀라서 먼저 미안하다고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를 원한 게 아니었던 터에 그것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 같다. 그녀는 마을 공동체 안에서 꽤나 목소리를 내는 편이었다.
이러이러한 절차로 아주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었던 사건은 결국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이들의 싸움으로 인해 발생한 부수적 사건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는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다. 상대에 대한 비방으로 글을 채우고 싶지는 않은데, 여전히 그때를 떠올리면 거대한 물음표가 머릿속에 쿵 하고 내려앉아 이성을 짓누른다. 중요한 것은 민트가 학교에 남긴 첫인상이었다. 민트는 충동조절이 되지 않으며,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요주의 인물로 분류됐다. 당시 남편이 학교에 불려 다니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오해를 풀려고도 해 봤지만, 민트 이름은 학교의 Black List에 상위랭크 됐다.
아이는 새로운 환경과 학교, 사람들에 적응 중이었고,
어쩌면 적응장애를 겪고 있는 중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