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순탄했다 - 유치원 시절
학교로부터 무작위 서신과 메시지 폭탄을 받고 보니, 지난 4년간 우리가 만난 이웃들과 선생님들이 얼마나 다정하고 사려 깊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독일에 온 후 한 달 만에 민트는 유치원에 갈 수 있었다. 9월 입학 시즌이 아닐 때 유치원 자리받기란 이곳에선 하늘의 별 따기이지만, 민트가 9월에 학교에 입학해야 할 나이라는 것을 고려해 동네 유치원에서 3월부터(2월에 독일로 갔다)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라는 것이, 유치원에 아이들 정원이 가득 차고, 교육/돌봄 인력이 부족해서 도저히 받을 수 없는데, 특별 배려로 딱 한 자리를 늘려줬다, 이 정도의 의미는 아니고, 원래 입학 시기인 9월은 아니지만, 사정이 급하니 받아 주었다는 정도의 의미이다. 이곳의 노동권은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온 사람으로선 가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보호받는다. 이 이야기는 중간중간 등장하게 될 테니 이 정도로 언급하고 슬쩍 넘어가 보자.
여기에서 어린이의 생애 주기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생일인데, 이건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도 해당되는 것으로 생일을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로 생각하고, 크건 작건 꼭! 파티를 열어 축하하고, 축하받는다. 그다음으론 두 번의 입학(처음 Grundschule 그리고 상급학교), 그리고 입학만큼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 것이 Vorschulkind(학교 입학 전 유치원 최고참 어린이를 일컫는 말) 기간 1년이다. 그 기간 동안 아이들은 유치원 최고령자로 대접을 받는 동시에 선생님들의 자잘한 업무도 돕고, 동생들의 다양한 활동을 돕기도 하는 등, 대접받는 만큼 책임을 다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학교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이 입학할 학교에 가서 다른 유치원 Vorschulkind들과 함께 학업(이라고 하기엔 굉장히 유치원 수준의 줄 긋기, 그림 그리기, 관련 있는 그림 연결하기 등)을 통해, 학생이 되는 연습을 한다. 교실에 일정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연습,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손을 들어 표시하고 기다리는 연습,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어진 과업을 해내는 연습. 유치원마다 다르긴 하지만, 유치원 자체에 Vorschulekurs(취학 전 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학교에서 적응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특별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러한 이유로 마침 Vorschulkind였던 민트는 잠시나마 유치원 자리를 빨리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유치원에 간 민트는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꽤 잘 적응해 나갔다. 유치원에 가기 전, 가장 급한 말 "Wasser, bitte.(물 주세요.), Pipi(쉬), Sei bitte Leise. (조용히 해)" 몇 마디와 독일어 숫자를 겨우 배우고 갔다. 그런데 며칠 유치원을 다녀온 민트는 친구가 생겼다고 했다. 말도 안 통하는 데 어떻게 친구를 사귀었는지 물어봤더니, 이야기 인 즉슨 이랬다.
친구가 레고를 가지고 놀길래, 자기도 옆에서 같이 레고를 가지고 한참 놀았다는 것이다. 그러다 친구(라고 하지만 사실 민트보다 한 살 어린 아이였다. 독일의 유치원은 만 3살부터 6살의 어린이가 섞여 한 반에서 생활한다)가 칼을 만들다 잘 되지 않아, 끙끙 거리는 것을 보고, 자기가 도와줬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둘이 그 레고 칼로 한참 잘 놀았다고 했다. 놀이 시간이 끝나면 유치원 선생님들은 "Räumt auf!"라고 하시는데,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치우라는 말이다. 며칠 유치원에 다닌 민트는 눈치로 알아듣고, 레고를 정리했는데, 그 친구가 놀이를 멈추지 않고, 장난감 정리도 하지 않길래, 눈을 쳐다보고, 레고를 한 손으로 들고, 레고 통을 다른 손으로 가리켰다고 한다. 그걸 또 알아들은 친구는 레고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레고 만들기로 시작해 레고 정리로 끝난 그날의 놀이는 두 아이를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끈끈한 우정으로 연결했다고 한다.
아마도 남자아이들이라 가능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놀이에 서사가 들어가는 여자 아이들과는 달리 남자아이들의 놀이는 몇 가지 의성어, 의태어만 있으면 얼마든지 신이 나고, 만난지 잠시 만에 절친 맺기도 가능하다(물론 모든 남자아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아이마다 개인차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전반적인 경향성은 확실히 그렇다). 민트 같은 경우 동물원이나 다른 지역 놀이터 같은,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난 아이와 한참을 실컷 놀고 난 뒤, '저 애는 이름이 뭐래?'라고 물어보면, '몰라'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들에게 이름 같은 건 그 순간을 함께 즐기는데 큰 의미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친구도 사귀고, 순조롭게 지내고 있던 민트 유치원 생활에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독일 유치원은 대부분의 시간이 자유 놀이로 채워져 있다. 매일 아침 동그랗게 둘러앉아 날짜, 요일, 날씨, 계절 등을 배우고, 방학 후엔 방학 때 뭐 했는지 이야기도 나누고, 생일자 친구가 있는 경우 함께 축하도 해 주는 Morgenkreis(직역하자면 아침 원, 아침에 동그랗게 앉아하는 활동이라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가 끝나고 나면 점심 전까지 실내 자유 놀이, 점심을 먹고, 낮잠 한 숨자고 나서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실외 자유 놀이, 대체로 이런 식의 일정이다. 물론 요일 별로 체육, 미술, 음악, 요리 등의 다양한 활동을 선생님 지휘 하에 하기는 한다. 하지만 한국 유치원의 빡빡한 스케줄에 비하자면 그냥 뭐 놀자판, 느낌. 처음 독일에 와서 유치원에 다니게 된 민트의 만족도는 굉장히 높았다. 하루 일과가 빡빡하게 짜인 한국 유치원이 민트 입장에서는 답답했던 것 같다. 그러다 이곳에 오니 주구장장 알아서(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데, 민트는 자기 주도성이-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해 볼 수도 있고, 좀 더 와닿게 표현해 보자면 지 맘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굉장히 높은 아이였던 것이다) 놀라고만 하니, 그런 점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민트의 표현으로는
한국에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했는데, 여긴 놀기만 하면 돼!
그런데 그 얼마 되지 않는 선생님과 하는 활동 시간에 민트는 하필 화장실에 가고 싶어진 것이다. 아마 노는 시간에 정신 팔려 노느라 화장실 가는 것도 잊어버려 그런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Pipi(쉬)라는 말은 배웠지만, 쉬 보다는 조금 더 큰일이 장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다급한 민트는 일단 배운 대로 검지 손가락을 펴고 팔을 들었다. 선생님이 민트의 이름을 불러주자, 일어나서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들었던 손으로 엉덩이를 가리키며 다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센스 있는(어쩌면 경험에서 나온 노련함으로) 선생님은 민트의 그야말로 온몸으로 표현하는 Body Language를 알아듣고, 민트의 장이 일을 내기 전에 화장실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곧 아이는 "Ich muss aufs Klo!"(저 화장실 가야 해요!)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하나의 위기는 낮잠 시간이었다. 신생아일 때부터 민트의 최대 이슈는 "잠"이었다. 에너지를 다 쓰지 않으면 도통 자려고 하지를 않았고, 그래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다 하다 못해 결국엔 울며 아이를 재운 날들이 숱하다. 행여 힘들게 재운 아이가 깰까 봐 숨 죽이며 지내던 날들.
딱 두 돌이 지난 이후부터 낮잠을 거부하기 시작해서, 어린이 집 선생님도 포기하고 그냥 안 재우기로 했던 민트였다. 그랬던 민트, 이제는 만 6세, 늠름한 Vorschulkind인 민트에게 낮잠 시간이니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했으니, 자기로선 그런 고역이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둘째와 셋째를 유치원에 보내 보니, 자기 싫은 아이들은 조용히 따로 놀게도 하던데, 민트의 반 선생님은 얄짤 없이 모든 아이들을 잠자는 방에 넣고, 눈감고 누워 있으라 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민트에게 유치원에서 있었던 이야길 물어보면 대부분 신나고, 재미난 이야기들 뿐이었는데, 낮잠 시간만큼은 유치원 다니는 내내 크나 큰 불만 사항으로 접수되었다.
유치원 생활은 순조롭게 해 나갔지만, 말없이도 신나게 놀 수 있었던 탓인지 생각만큼 독일어가 빨리 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민트를 1년 더 유치원에 머물게 할 생각이었다. 독일에서는 꼭 외국인이 아니어도 아이의 발달 상황에 따라 만 7세(원래 입학은 만 6세 9월)에 늦춰서 입학을 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아이가 학교에 갈 정도로 발달했는지 검사(Schuleingangsuntersuchung)하는데, 시력, 청력, 연령에 맞는 정신/ 신체 발달, 주의력, 업무 수행 능력, 언어발달과 인지능력, 사회/정서적 기술과 능력 등을 다양하게 검사한 후 입학을 결정한다. 민트의 경우 언어(독일어)가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자 유치원 선생님들은 약간 곤란한 기색을 내비치며, 독일어는 아직 잘 안되지만 다른 능력이 이미 다 충분히 발달했기 때문에 유치원에 남아있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아이도 유치원 생활이 지루할 것이라며, 바로 입학하기를 권했다.
유치원에서 몇 달간 민트를 지켜본 선생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급하게 Schuleingangsuntersuchung(학교 입학 검사)을 하고, 급하게 가방도 사서, 이주 7개 여월 만에 민트는 독일의 학생이 되었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정말 민트의 미래를 위해서 그런 조언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민트가 좀 빡세서(?) 빨리 졸업을 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아직도 의문이지만 결과적으로 빠른 입학이 민트의 독일어 성장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므로 그녀들의 진심을 믿어주기로 했다.
민트의 유치원 시절, 우리의 이민 첫 6개월,
눈물이 나도록 재미나고, 미소가 번지게 짠했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