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음식을 좋아했던 나는 남들이 '와'라고 탄성을 자아낼 만큼 공부를 했다.
학자의 길과 헌신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부응할 시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을 때,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게 마음이 편했다. 그 길이었나 보다.
나름 고민의 경계의 위치에 커피숍이 자리 잡혔다. 커피를 좋아만 했던 나인 터라 뭐든지 처음이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리라. 공부할 때는 책상에서 잤다면 커피숍을 하고 나서는 커피숍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여름이었다.) 잤다. 테이크아웃 전문 커피숍 체인점이었는데 여름에는 그야말로 극성수기이다. 15년 전에는 진동벨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술집들이 즐비한 먹자골목 쪽이라 손님이 끊이지를 않았고 한여름밤 불타는 밤은 이제 마감이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돌아오는 것은 술에 취해 허둥거리면 반발하는 청년들의 아우성이었다. 그때 당시는 대학가 근처라 그런지 딱딱 떨어지는 차가움, 이해가 아닌 강요로 물든 사회였다.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난 그 말들을 하나하나 지나치지 못했다. 만약에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삶의 태도가 달라졌을 것 같다.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수더분함과 나를 옥죄는 강박에 대해 편안하게 맞서는 법...
그런 암흑기를 통해 성장한다고 했던가,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오히려 딱 맞아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이 아닌 뉴페이스 손님, 의대 교수님과 첫 만남이었다. 어찌나 인자하신지.. 그때는 3년 중의 초창기라 어리바리했던 청년 사장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라 그러신지 에스프레소를 뽑을 때도 허둥지둥인 나에게 다른 손님부터 대접해도 된다고 이야기해 주셨다. 늘 도피오로 드신 첫 손님이 자 마지막 손님이시기도 했다. 난 아무리 커피를 좋아해도 진하게는 못 먹는데 그게 또 신기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넓은 마음이 감사했다. 내가 잘 뽑았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소송을 하겠다는 손님부터 별것 아닌 것에 소리치는 손님들 덕에 마음의 병이 들 무렵이었는데 교수님의 따스한 시선과 관심 덕에 그 상처의 자리가 아물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음속에 늘 감사함이 있다. 신기하게 교수님 자제분도 소개팅해 주시려고 했는데 돌려서 넌지시 의중만 비추시는 모습이 내가 사랑하는 아빠와 비슷했다. 늘 북돋아주시고 다른 손님들도 소개해주셨다. 다른 교수님들도 교수님과 결이 같아서 따뜻했다.
버블티가 잘 익지 않았을 때도 유쾌하게 알려주셔서 다시 고민했던 조리법이었다. 날세운 말투가 아닌 진심으로 걱정해주시는 말들이었다. 요즘에서야 말투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미 배우신 분들이다. 천직이 있긴 한가부다. 저런 교수님들께 배우는 한양대 학생들이 부럽기도 했다.
뼛속까지 인문학적인 나는 상업적으로 변모하는데 시간이 너무나도 걸렸다. 숫자에 둔감하기도 해서 커피숍 포스기계에 의지한 채 매출을 알아챘다. 매출만 신경쓰면 손님들이 다 돈으로만 보일까봐 스스로 체면을 거는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진정 커피를 사랑해서 그걸 알려주고 싶고 더 맛있는 커피를 위해 고민했다.
두번째 기억나는 손님은 아직도 이름은 알지 못하고 연락도 되지 않지만 벨벳밀크를 냈을 때 따로 퍼밍스푼으로 떠서 냈는지 아님 그대로 따라 부었는지를 맞춘 손님분이셨다. 그 15년전에는 커피전문점도 별로 없을 때였다. 에스프레소를 27초에 내리느라 어깨가 다 나간 나를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그 몽글몽글한 우유거품이 따스하게 목을 터치했다고 하시면서 바리스타라고 하셨다. 직업적 윤리가 맞닿고 동료가 생긴 기분이었다. 난 상대방의 개인적 기호를 중시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커피를 좋아했고 학부시절에도 아침먹을 시간이 부족해 연한 라떼로 떼웠다. 그렇기에 비록 한 잔이지만 최선을 다해 기호에 맞추고 늘 생각하면서 샷을 내렸는데 오랜 친구처럼 나를 알아주고 이해받는 기분은 무엇보다도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