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처음 손을 잡은 날

윤호의 시점

제14화. 처음 손을 잡은 날

윤호의 시점


정숙 아가씨를 처음 본 건 늦가을이었다.

볕이 약해지고, 바람이 마른 나뭇잎을 쓸고 지나가던 날.

그로부터 석 달이 흘렀다.

편지로만 마음을 전하던 사이, 겨울이 깊어졌다.


지금 나는, 다시 그 마을 어귀에 서 있다.

늦겨울.

바람은 매서웠지만, 마음은 오히려 그때보다 더 따뜻했다.

백일 남짓한 시간,

우리가 나눈 편지는 스무 통이 넘었다.

누군가는 짧다 하겠지만,

그 편지들엔 열 해를 살아도 모으지 못할 마음들이 담겨 있었다.


큰아버지와 함께 대문을 들어섰을 때

정숙 아가씨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살며시 숙였다.

나는 그 순간, 그동안 마음속에서만 만나던 얼굴이

이제야 다시 현실이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어른들은 사랑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분한 말소리, 조심스러운 웃음, 짧은 기침 소리.

혼례 날짜가 오갈지도 모를, 그런 대화들이었다.


나는 마루 끝에 서 있던 정숙 아가씨와 눈을 맞췄다.

그녀가 먼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걸 허락이라 여겼다.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마당을 나섰다.

정숙도 뒤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눈이 완전히 녹지 않은 들길을 따라,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가끔 마른 풀잎이 발끝에 부스럭거렸다.

개울가에 도착하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개울물이 참 조용하네요.

가을에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더 많았는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흩트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녀와 나란히 서 있는 이 짧은 시간이

그 어떤 긴 편지보다 진하게 마음을 데웠다.


나는 손을 조심스레 옆으로 뻗었다.

그녀의 손등이, 내 손가락 끝에 스쳤다.

정숙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손을 빼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나는 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손을 감쌌다.

작고 따뜻하고,

놀라울 만큼 말없이 많은 걸 말해주는 손이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 소리가 개울물 흐르는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 손을 쥔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겨울의 구름 사이로

햇살이 한 줄기,

정숙의 옆얼굴에 내려앉았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이 사람과 평생 함께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편지가 아닌, 손끝으로 닿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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