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봄이 오는 소리
제71화. 봄이 오는 소리
1990년 2월,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교실 창가에 앉으면, 아직 찬 공기 사이로 봄내음이 살짝 실려왔다.
나는 종종 하영이와 말없이 같은 창밖을 보며 앉아 있었다.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할 때도 있었다.
하영이는 여전히 진지했고,
윤하는 가끔 학교에 와서는 오디션 얘기를 하며 눈을 반짝였다.
나만,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1990년은 그렇게 시작된 것 같다.
조금은 조용하고, 조금은 막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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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이의 거리감
하영이는 요즘, 현철 오빠와의 대화가 많았다.
도서관에서도, 집 앞 골목에서도 둘만의 이야기들이 깊어지는 듯했다.
"선영아, 너도 그 책 읽어봤지? 현철 오빠가 그 작가 정말 좋아하더라."
하영이가 내게 말을 건넬 때면,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봤어. 근데 좀 어려워서 중간에 덮었어."
하영이는 잠깐 내 눈을 바라보다 웃었다.
"괜찮아, 나도 첨엔 그랬어."
그 웃음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던 날,
나는 왠지 모르게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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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의 속도
윤하는 진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가끔 교무실 앞 복도에 그의 노래가 울렸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다들 윤하의 재능을 인정했다.
"너, 진짜 데뷔할 것 같아."
"그런 말 마. 아직 갈 길 멀어."
겸손한 말과 달리, 윤하의 눈빛은 단단했다.
그 아이는 누구보다 자기 확신이 있었다.
"너희는 뭐 되고 싶어?"
그 질문에 하영이는 교수라고 했고,
나는 잠깐 말이 막혔다가
"드라마 작가…? 그런 거."
하고 작게 내뱉었다.
윤하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어울린다. 너 글 잘 쓰잖아."
그 말에 나는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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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시작의 시절
그해 봄, 우린 3학년이 되었다.
복도엔 새로 온 후배들이 분주했고,
우리의 시간은 조금씩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하영이와 나는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윤하는 여전히 연습실과 방송국, 학교를 오갔다.
내가 느리게 걷는 것 같아도,
어쩌면 나도 나만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걸까?
나는 여전히 하이틴 소설을 좋아했고,
종종 글을 쓰며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어느 날, 작은 문집 대회에서 내 글이 뽑혔다.
하영이보다도 윤하보다도 먼저 이름이 불렸던 그 순간.
나는 비로소 내가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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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은 우리 모두에게 다르게 기억될 것이다.
누군가는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된 해,
누군가는 무대의 흥분을 느낀 해,
또 누군가는 자기 안의 목소리를 찾기 시작한 해.
나는 아직도 여전히 성장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