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골목

45화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기억의 골목 45화

밥상 위의 사랑

아랫마을 우물에서 언니가 힘겹게 길어온 물,
그 물로 엄마는 밥을 지으셨다.
굳은 밭일로 지친 몸을 이끌고도
엄마는 늘 뚝딱뚝딱,
반찬 몇 가지를 정갈하게 차려내셨다.

엄마는 젊은 시절
아빠의 외갓집에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셨다.
그 집에는 식구도 많았고, 손님도 많았다.
새벽이면 부엌 불을 지피고,
외사촌들 도시락을 수십 개씩 싸느라
잠이 부족했던 날들이 수두룩했다.

그때 익힌 손맛 덕분인지
엄마는 어떤 재료든 기가 막히게 살려냈다.

된장 하나만 있어도
고추장 하나만 있어도
소박하고도 깊은 맛의 찬이 금세 상 위에 올라왔다.

특히 고추장에 밥 비벼 먹는 날은
언니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릇을 꼭 끌어안고 앉았다.
“이게 제일 맛있어.”
입꼬리를 올리며 그렇게 말하던 언니.

미경 언니는 아직 숟가락질이 서툴러
밥풀을 코에 묻히고 있었고,
나는 엄마 무릎 위에서
밥 냄새에 킁킁대던 갓난쟁이였다.

세 딸과 마주한 밥상 앞에서
엄마는 아무리 힘들어도
밥은 꼭 제대로 지으셨다.
“애들 입에 들어가는 건 아껴선 안 돼.”
그 말이 엄마의 철칙이었다.

어쩌다 아빠가 서울에서 내려오는 날엔
엄마는 묵혀두었던 김치를 꺼내고,
밭에서 방금 캐온 감자를 삶아 상에 올렸다.
비록 고기 한 점 없어도
그 밥상에는 사랑과 손맛이 꽉 들어찼다.

밥 냄새가 나는 부엌,
작은 숟가락 소리,
엄마의 젓가락이 먼저 가는 곳은
항상 언니의 그릇이었다.

“미자야, 많이 먹어야 힘이 나지.”
언니는 엄마의 말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말속엔 고마움보다 더 큰 책임이 담겨 있었음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밥상은 작았지만
그 위엔 세 딸의 오늘과 내일이
따뜻하게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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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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