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74화. TV 속의 아빠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계속되던 1983년 여름,
아빠는 점점 더 분주해지셨다.
서울 장충동, 철공소집 둘째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말.
그것이 할머니께 들은 아빠의 유일한 혈연 정보였다.
그 이상은 묻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수십 년을 살아오셨다.
“아버지가… 외출하셨다가 돌아가셨다고만 하셨지…”
아빠는 늘 그 말에서 멈추셨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어디서였는지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아빠는
‘아버지’를 마음속에서만 오래 불렀다.
방송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직접 신청서를 작성하셨다.
친인척 이름은 모른다고 써넣고,
본가의 위치, 가능한 단서들을 다 적어내셨다.
며칠 뒤, 우리 가족은
TV 화면 아래, 자막으로 흘러나오는 아빠의 이름을 보았다.
"황○○, 1936년생이 서울 장충동 철공소집 둘째 아들 찾습니다."
"엄마다! 아빠 이름이 나와!!"
나는 동생들과 함께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화면을 바라보셨다.
아빠는 눈을 깜빡이며, 긴 숨을 쉬셨다.
말없이, 아주 오래.
며칠 뒤,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실제 방송 화면에 아빠가 출연하게 된 것이다.
그날 아침,
엄마는 아빠의 셔츠를 다려 입히고,
우리는 고운 바지를 꺼내 드렸다.
머리도 정갈히 다듬고,
아빠는 그날,
가장 단정하고, 가장 떨리는 모습으로
방송국 카메라 앞에 섰다.
"나는 어릴 적 외할머니 손에 컸고,
서울 장충동 철공소집 둘째 아들이라 들었습니다.
돌아가셨다지만, 형제라도, 누이라도…
혹시, 보고 계시다면… 꼭 연락해 주십시오."
카메라는 아빠의 얼굴을 비췄다.
그 표정엔 그리움도, 담담함도, 한도 함께 있었다.
우리는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아빠가 말하는 장면을 함께 지켜보았다.
그날 밤,
동네 사람들도 아빠를 TV에서 봤다고 했다.
엄마는 작게 웃으셨지만,
그 눈엔 울컥한 마음이 맺혀 있었다.
그날 이후,
아빠는 혹시라도 누가 연락이 올까
낯선 번호의 전화벨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고,
매일 방송을 보며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속 이름을 불러보셨다.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찾았을 수도 있다.
그건 다음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여름,
아빠는 살아온 세월을 처음으로
당당히 말할 수 있었고,
그 얼굴이 TV 화면 속에 또렷이 남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