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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골목

96화

96화. 구멍가게 사랑채에서

아빠는 겨울만 되면

언덕 위 구멍가게 사랑채에 자주 가셨다.

동네 어르신들과 술 한잔,

화투 한판, 윷놀이로 흥이 올라

밤늦게까지 이어지곤 했다.


**


엄마는 그런 아빠를 끔찍해하셨다.

"어디 사람 구실 못하게 하고 다니셔!"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속으론 걱정이 더 크셨던 것 같다.


술이 과해

길에 누울까,

싸움을 할까,

춥게 들어오실까…

엄마는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이셨다.


**


그래서 내게

심부름이 생겼다.


"가서 아빠 좀 데려와라."

엄마가 말하면

나는 털모자 눌러쓰고

구멍가게 언덕길을 올라갔다.


눈 내린 날이면 발자국이

딱 아빠 집 데려가는 길처럼 찍혔다.


**


구멍가게 안은

언제나 따뜻하고

웃음소리 가득했지만

나는 아빠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내려왔다.


"아빠, 엄마 기다리셔."


아빠는 잠깐 버티다

결국 나와 함께 집으로 오셨다.

술이 덜 오르셨을 땐

"그래, 간다~ 간다~"

하시며 수월히 따라오셨다.


**


그 겨울마다

나는 조용히 아빠의 그림자 뒤를 따랐다.

어린 내가 맡은

아빠의 귀가 담당.


그건 우리 집만의

겨울 의식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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