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96화. 구멍가게 사랑채에서
아빠는 겨울만 되면
언덕 위 구멍가게 사랑채에 자주 가셨다.
동네 어르신들과 술 한잔,
화투 한판, 윷놀이로 흥이 올라
밤늦게까지 이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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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런 아빠를 끔찍해하셨다.
"어디 사람 구실 못하게 하고 다니셔!"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속으론 걱정이 더 크셨던 것 같다.
술이 과해
길에 누울까,
싸움을 할까,
춥게 들어오실까…
엄마는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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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게
심부름이 생겼다.
"가서 아빠 좀 데려와라."
엄마가 말하면
나는 털모자 눌러쓰고
구멍가게 언덕길을 올라갔다.
눈 내린 날이면 발자국이
딱 아빠 집 데려가는 길처럼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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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안은
언제나 따뜻하고
웃음소리 가득했지만
나는 아빠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내려왔다.
"아빠, 엄마 기다리셔."
아빠는 잠깐 버티다
결국 나와 함께 집으로 오셨다.
술이 덜 오르셨을 땐
"그래, 간다~ 간다~"
하시며 수월히 따라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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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마다
나는 조용히 아빠의 그림자 뒤를 따랐다.
어린 내가 맡은
아빠의 귀가 담당.
그건 우리 집만의
겨울 의식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