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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골목

97화

97화. 겨울밤, 아빠 데리러 가는 길

늦은 밤이었다.
엄마가 나를 깨웠다.
"가서 아빠 좀 데려오너라."
난 부스스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

그 시절,
엄마에게 난 가장 만만한 아이였는지도 모르겠다.
부탁하면 말없이 움직이는 아이.
기특하게 여겨졌을까,
아니면 그냥 익숙했던 걸까.

**

나는 외투를 걸치고
언덕 위 구멍가게로 향했다.
겨울 공기는 매서웠고
그 언덕길은 참 멀게만 느껴졌다.

**

사랑채 문을 열면
안에선 화투판이 한창이었다.
웃음소리, 술잔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아빠의 태평한 얼굴.

**

나를 본 어른들이
"춥지? 얼른 들어와~"
하며 손짓하셨다.
나는 아빠 옆에 조심스레 앉아
팔을 끌며 속삭였다.

"아빠, 엄마가 기다려요...
이제 그만 가요..."

**

그러면 이긴 어른이
웃으며 내게 말하셨다.
"아이고, 똑똑하다.
우리 ○○이가 집 걱정 다 하네~
한 판만 더 하고 가자, 응?"

그리고는
내 손에 과자 하나,
천 원짜리 지폐 하나를 쥐어주셨다.

**

그 작은 손에 과자와 돈이 쥐어졌지만
난 사실 그보다 아빠 손을 더 꼭 잡고 있었다.

"한 판만 하고, 진짜 가요."
그렇게 나는
화투판 한쪽에서 기다리는 아이였다.

**

그 겨울밤들 속,
나는 몇 번이고 그 언덕길을 올랐다.
어느 밤은 눈이 쌓여 있고
어느 밤은 귀 끝이 얼어버릴 만큼 추웠다.

그런데도
난 아빠를 데리러 가는 그 길이
왠지 싫지 않았다.

아빠와 함께 걷는 돌아오는 길이,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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