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하나로부터

3화

3화. 우리 어머니의 주전자

어머니는 저녁 식사가 끝나면

언제나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밥상이 치워지고, 아이들이 제각기 방으로 흩어지는 그 시간.

어머니는 말없이 하얀 법랑 주전자를 꺼내 들고,

보리를 한 움큼 넣고 물을 부었다.


화롯불에 주전자를 올리면,

곧 물이 끓기 시작했다.

방 안까지 퍼지는 보리차 냄새는

하루의 끝을 알리는 신호 같았다.


나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뭔가 따뜻하고, 안전하고, 부드러운 느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보리 냄새가 아니라

어머니의 하루를 닮은 냄새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바쁘셨다.

아침엔 우리를 깨우고,

밥 짓고 도시락을 싸주시고,

점심엔 밭일을 다녀오셨다.

저녁엔 다시 식구들 끼니를 차리고,

그제야 부엌 조명을 어슴푸레하게 켜고

보리차를 끓이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시면서도

어머니는 늘 우리 다음 날을 준비하셨다.

“물은 미리 끓여놔야 아침에 정신 안 없지.”

그러곤 주전자의 뚜껑을 살짝 열어

김이 나는지 살펴보셨다.


어릴 땐 그게 그저 습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건 가족을 위한 조용한 예고장이었다.

“내일도 너희를 위해 보리차처럼 따뜻할게.”

어머니는 그렇게 말없이 약속하셨다.


가끔 밤중에 목이 말라 깼을 때,

부엌에서 미지근하게 식은 보리차를 마시면

어머니가 곁에 있는 듯했다.

그 한 모금의 온기가

어떤 불안도 잠시 누그러뜨려주곤 했다.


지금 내 집에도 보리차가 있다.

전자주전자에 편하게 끓이는 티백 보리차지만,

가끔은 법랑 주전자가 그립다.

그 안에서 끓던 시간,

어머니의 숨결,

그리고 우리 집의 하루하루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늘 말이 없으셨지만,

그 주전자는 당신의 언어였다.

보리차를 끓이던 손길,

그 따뜻한 소리와 냄새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조용히,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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