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첫 농사, 나를 일구다》
11화. 가을, 수확의 끝에서 겨울을 준비하다
가을은, 참 빠르다.
어느덧 수확도 끝나고,
밭머리에 쌓아둔 잡초 더미들이
말라비틀어지고 있다.
비닐은 걷어냈고,
고구마는 이미 이웃들과 나눠 먹었고,
수박 밭이었던 자리는
흙만 덩그러니 남았다.
풀과의 전쟁이 끝나니
이제는 적막이 밭을 감싸고 있다.
첫해 농사는 그렇게 끝났다.
잘했다고 말해줄 사람은 없지만,
밭은 내게 조용히 수고했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이 밭을 많이 걸었고,
무릎을 꿇었고,
땀을 흘렸고,
실망도 했고,
작은 기쁨에 소리 내 웃기도 했다.
비 오는 날이면 흙길이 질척였고,
해가 강한 날엔 두건으로 목을 감아야 했다.
손톱 밑에 흙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손가락 관절마다 파스를 붙인 날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힘들었던 기억보다
좋았던 순간들이 더 오래 남는다.
처음 수박을 잘라봤을 때
붉은 속살이 맑고 단단했던 그 모습,
더덕 싹이 처음 올라왔을 때의 감동,
그 여름 저녁,
밭머리에 앉아
해 지는 걸 바라보던 고요함.
그 기억들 덕분에
나는 내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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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밭은
내가 걷어낸 비닐, 지지대,
풀과 작물의 흔적들이 섞여
하루하루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밭을 정리한다는 건,
마음을 정리하는 것과 같다.
더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심을 수 있는 만큼만,
돌볼 수 있는 만큼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자연과 관계를 맺어가기로.
작은 작업실에 앉아
밭에서 남은 고구마 몇 개를 굽는다.
군고구마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지고
나는 머릿속으로 내년 봄을 그린다.
어떤 씨앗을 살까,
두둑을 몇 줄 만들까.
혹시 온실을 작게라도 해볼 수 있을까.
올해는 실험이었다면
내년은 조율이다.
이제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이 땅이 내게 뭘 원하는지.
그리고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겨울은 쉼이고,
동시에 시작이다.
봄을 위한 기초가 되는 계절.
첫해 농사를 마친 나는
겨울의 초입에서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내년엔 더 정갈한 마음으로,
더 따뜻한 눈으로
이 밭을 바라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