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자서전

처마 밑 작은 스승, 제비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처마 밑 작은 스승, 제비

프롤로그

봄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손님이 있습니다.
작고 가벼운 날개로 긴 바다와 산을 건너와, 우리 집 처마 밑을 고향처럼 찾아드는 제비.
그들의 성실한 삶을 바라보며 나는 매년 새삼스레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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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집, 새로운 시작

매년 이른 봄이면, 내 마음은 설레며 기다린다. 아직 아침 공기는 차갑고 들녘엔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하늘은 어느새 파르르 빛을 달고 있다. 그 무렵이면, 우리 집 처마 밑에는 낯익은 손님이 찾아온다.

빨랫줄에 살짝 걸터앉아, 한참 동안 처마 밑을 올려다보는 작은 몸짓. 날개는 여전히 길고 매끈하지만, 눈빛은 언제나 성실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약속을 지키듯, 제비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돌아온다. 그들의 귀환은 늘 조용하지만, 내겐 커다란 울림이 된다.

흥미로운 건 제비의 습성이다. 해마다 그 자리에 오지만, 예전 둥지를 고쳐 쓰지 않는다. 둥지는 그대로 두었는데도, 제비는 옆자리에 흙과 풀을 다시 날라 쌓아 올린다. 나는 여러 번 속으로 생각했다.
‘굳이 새로 지을 필요가 있을까. 힘들 텐데.’

그래서 일부러 오래된 둥지를 부수지 않고 그대로 두어 보았다. 혹시 다시 들어와 깃들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제비는 한 번도 빈 둥지를 그대로 쓰지 않았다. 언제나 새로운 집을, 새로운 둥지를 지었다.

그 모습은 내게 묘한 깨달음을 주었다. 삶이란 어제의 집에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집을 새로 짓는 일임을. 아무리 같은 자리라 해도, 마음은 늘 새로워야 하고, 터전은 다시 다져야 한다는 것을 제비는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제비가 집을 짓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때때로 현대의 건물 짓기가 떠오른다.
우리는 커다란 기계와 수많은 사람, 그리고 설계도의 힘을 빌려 집을 세운다. 철근과 콘크리트, 유리와 철판이 어우러져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건물이 올라간다. 거대한 장비와 돈, 시간과 노동이 투입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제비는 그렇지 않다.
그 작은 부리 하나로 흙과 지푸라기를 날아와, 입 안에서 돌돌 말아 하나의 벽돌처럼 다져낸다. 빗물에 씻겨 내려가지 않도록 여러 겹을 쌓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촘촘히 맞물려 쌓는다. 마치 미장이가 흙벽을 바르듯, 제비는 한 올 한 올을 단단히 다져낸다.

우리는 때로 최신 기술로 지은 건물조차 금세 금이 가고 허물어지는 경우를 본다. 하지만 제비의 집은, 그 작은 부리로 빚은 흙과 지푸라기의 조합이 생각보다 견고하다. 폭우가 쏟아져도, 바람이 불어도, 그 집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 속에서 새끼들이 태어나고, 날아오를 힘을 길러낸다.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튼튼한 집이란, 규모의 크기가 아니라 정성과 성실함에서 비롯되는구나.’
거대한 건축물도 결국은 작은 벽돌 하나, 작은 철근 하나가 모여 완성되듯, 제비의 집 또한 작은 흙덩이 하나, 지푸라기 한 올에서 시작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의 성실이 쌓여야 비로소 무너지지 않는 집이 되는 것이다.

흙 한 조각, 풀 한 올이 모여 작지만 단단한 보금자리가 된다. 그것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봄의 시작이고 생명의 무대였다. 나는 그들의 집 짓기를 바라보며, 내 삶도 매일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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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이 아닌, 살아 있는 집

제비에게서 배운 또 다른 놀라움은, 그들이 빈집에는 둥지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꼭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 처마 밑을 택했다. 텅 빈 집은 아무리 안전해 보여도, 제비는 거기에 집을 짓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오래 생각했다.
사람들의 기척이 외부의 적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살아 있는 숨결이 있어야만 제비도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일까?

분명한 건, 제비는 생명이 머무는 집을 택한다는 것이다. 바람만 스쳐가는 빈집은 그들에게 둥지가 될 수 없었다. 그 사실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집이란 벽과 지붕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 숨 쉬는 자리라는 것. 제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웃음과 울음이 오가며 하루의 온기가 머무는 집만이, 제비에게도 집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선택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삶이 있어야 집도 빛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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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이라는 이름의 날갯짓

봄날 내내, 제비 부부는 쉼이 없었다. 날개는 끊임없이 하늘을 가르고, 부리는 작은 먹잇감을 물어 왔다. 하루에도 수십 번, 같은 길을 오가며 새끼들에게 먹이를 물려주었다.

그들의 작은 몸짓은 마치 계절의 시계추처럼 정확하고 성실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해가 저물어도 멈추지 않았다. 그 부지런함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어느새 숙연해졌다.

시간이 흘러 새끼들이 둥지를 나설 무렵이면, 하늘가에 작은 울음과 떨림이 가득했다. 날갯짓을 배워가며 서툴게 허공을 가르는 모습은, 아이가 첫걸음을 떼는 순간처럼 경이로웠다. 부모 제비는 끝까지 그 곁을 지키며 날갯짓을 북돋았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떠날 때가 온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토록 북적이던 처마 밑은 고요하다. 둥지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제비 가족은 홀연히 떠나고 없다. 떠남의 순간조차 담담하다. 머무를 때는 최선을 다하고, 떠날 때는 미련이 없다.

나는 그 모습에서 성실함의 진정한 의미를 배운다. 성실하다는 건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제 몫을 다하는 일. 그리고 떠날 때가 되면 담백하게 내려놓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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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가 남긴 교훈

이제는 마을에서도 제비를 보기 힘들어졌다. 도시가 커지고, 처마가 있는 집이 줄어들면서, 제비가 앉을자리도 사라졌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여전히 매년 봄이면 돌아오던 제비의 눈빛이 남아 있다.

그 눈빛은 나를 향해 묻는다.
“너는 올 한 해도 성실히 살 준비가 되었느냐.”

나는 그 물음 앞에서 늘 부끄럽다. 하지만 동시에 힘을 얻는다. 제비는 먼 길을 날아와 새로운 집을 짓고, 새 생명을 품고, 그리고 떠난다. 그 단순하고도 단단한 삶의 방식은 내가 평생 붙들고 싶은 삶의 태도가 되었다.

매년 같은 자리에서 새로운 둥지를 짓는 제비의 모습은, 내게 오늘을 새롭게 살라는 다짐을 준다. 빈집이 아닌 살아 있는 집을 택하는 그들의 습성은, 삶이란 결국 살아 있는 순간에만 빛난다는 것을 알려준다.

나는 이제 제비를 떠올리면 단순한 철새가 아니라, 내 삶을 가르쳐 준 작은 스승으로 여긴다. 그들의 성실한 날갯짓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매년 봄마다 다시 날아와 나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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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제비는 더 이상 흔한 풍경이 아니지만, 내 마음속 처마 밑엔 여전히 그들의 둥지가 남아 있습니다.
다시 돌아올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나는 제비처럼 성실하게 하루를 쌓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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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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