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서 모르는 척했던 시간

나는 늘 피곤했다.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8화. 알면서 모르는 척했던 시간

그 무렵,
나는 늘 피곤했다.

낮엔 수업,
저녁엔 알바,
틈틈이 일본어 강의까지.

외삼촌댁 옥탑방으로 돌아가는 밤이면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말 한마디 하기조차 버거웠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감정까지
받아들일 여유는 없었다.
받아들이는 건커녕
마주 보는 것도 어려운 상태였다.

그런데 선배는—
자꾸 내 안으로 들어왔다.

가까이,
말없이,
그러면서도 분명히.

그가 나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걸
나도 알았다.

점심시간마다 내 옆에 앉고,
수업이 끝나면 책 한 권을 건네고,
퇴근길엔 갑자기 나타나
커다란 우산을 씌워주고.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건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받을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만을 향해 가고 싶어진다.
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비우고,
마음을 덜어내고,
어쩌면 계획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내 하루를 쥐고 서있기에도
너무 간신히 버티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도망쳤다.
모른 척했고,
애써 무심한 척했다.

선배가 무언가 말을 꺼낼 듯한 기류가 흐를 때면
내가 먼저 얼버무렸다.
“선배, 우리 과제 다음 주까지잖아요.”
“선배, 그 책 아직 반도 못 읽었어요.”

그럴 때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이 참 서운했지만
한편으론 고마웠다.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아서.
내게 선택권을 줘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어줘서.

사실은—
나도 그가 좋았다.

그의 따뜻한 말투,
내 안을 들여다보는 시선,
어떤 날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그 마음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건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땐 그냥
이대로만,
아무 일 없이
졸업까지 갔으면 좋겠다고
바랐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사랑을 거절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 시절,
그 선택조차 가만히 받아주던 사람이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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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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