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문 앞에 놓인 마음

정말, 너무 아팠다.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12화. 그날, 문 앞에 놓인 마음」

그날은 유난히 몸이 무거웠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고, 목이 따갑고,
기운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쌓여온 피로가
기어이 내 몸을 쓰러뜨린 듯했다.

정말, 너무 아팠다.
마음도, 몸도.

일요일, 집에서 혼자 쉬고 있었는데
늦은 오후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를 들 기운도 없었지만
익숙한 벨소리에 조심스레 수화기를 들었다.

“문 앞에 약이랑 도시락 놔뒀어.
따뜻할 때 먹어.
약은 밥 먹고 꼭 먹고.”

선배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숨을 쉬기도 버거운 내 마음에
너무 깊게 파고들었다.

난 대답할 수 없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눈물이 먼저 흘러버렸으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난 널 여자로는 좋아하지 않을게.
그냥 친구로 지내자.
같은 시대를 같이 가는 친구.
부담 갖지 마.”

그 말은,
그가 나를 얼마나 깊이 좋아했는지를 말해주는 고백이었다.
그 마음조차 부담이 될까 봐
스스로 한 발 물러선, 조심스러운 사랑의 마지막 표현.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전화기 너머로
내 침묵과 울먹임만 흘렀을 것이다.

문을 열었다.
정말 그가 말한 그대로
문 앞에 작고 따뜻한 도시락과 약봉투가 놓여 있었다.
도시락은 편의점 것도, 대충 싸 온 것도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알았는지
가볍게 볶은 채소, 달걀말이, 국도 따로 담겨 있었다.
비닐팩 안에 손수건도 들어 있었다.

그 사람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어디 아픈지,
무슨 계절을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나보다 앞서
나를 너무 걱정하고, 너무 배려했던 사람이었다.

그날,
선배는 나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고백했다.

“난 널 여자로는 좋아하지 않을게.”

그 말이
그 사람 마음의 끝이 아니라
끝까지 나를 지켜주고 싶었던 시작이었다는 걸
그땐 몰랐다.

나는,
사랑이라는 말이 무거워서
애써 외면하고 있었고,
선배는
그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누르지 않도록
스스로 마음을 내려놓는 걸 선택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이전처럼 자주 마주치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스치듯 눈이 마주쳐도
그는 웃지도,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함께 걷지 않아도,
멀리서
그대로 내 시간을 지켜주는
한 사람의 '친구'.

그리고 나는 그날,
문 앞에 놓인 도시락과 약봉투를 보며
처음으로 이 감정을 정확하게 이름 붙였다.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멀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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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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