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냈다.
13화. 그렇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1993년 가을.
우린 둘 다 3학년이었고,
도서관이 두 번째 집 같던 시절이었다.
자격증, 토익, 면접 준비.
미래가 한 발짝씩 가까워진다는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냈다.
그리고…
선배와 나는 애써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지냈다.
“혜선이는 요즘도 강의해?”
“혜선이 요즘 열공 모드야.”
선배는 과 친구들에게 날 **‘소중한 혜선이’**라고 불렀다.
장난스럽고, 가볍게.
그 말 한마디에 친구들도 자연스레
나를 웃기고 챙기며 대했다.
우리 사이엔
그 어떤 사적인 감정도 없는 것처럼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었고,
우리는 그 믿음을 깨지 않기 위해
어색하지 않게,
그저 '좋은 선후배'처럼 행동했다.
되도록 단둘이 있는 자리는 피했고
도서관에도 친구들과 무리 지어 갔다.
밥을 먹을 때도 항상 누군가 옆에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도
선배와 나는 서로를 가장 먼저 챙겼다.
“혜선이는 아아 말고 따뜻한 걸로.”
“선배는 김밥보다 샌드위 치지.”
누구보다 먼저 내 음료를 챙기고,
내가 앉을자리를 비워두고,
내가 피곤하면 조용히 내 책을 덮어주던 사람.
그 다정함이,
예전보다 더 작아졌다는 걸 알면서도
난 애써 외면했다.
선배는 예전처럼 매일 연락하진 않았다.
가끔 연락이 와도
내 안부만 묻고는 짧게 통화를 끝냈다.
내가 “잘 지내요?”라고 물으면
그는 항상 웃으며 “잘 지내지~”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정말일까,
그 말 뒤에 다른 마음은 없을까,
궁금했지만
그걸 물어볼 자격은 내게 없었다.
그해 가을,
선배와 나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사이로 지냈다.
언제부터인지
도서관 자리도
자연스레 한 칸, 두 칸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누구 탓도 아닌, 그냥 흐름처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덜 외로웠다.
도서관 한쪽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
문득 마주친 눈인사,
가끔 웃으며 툭 던지는 농담.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였을까.
그게 그리움이 아니면, 난 왜 그런 장면들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을까.
가끔 선배가 안 보이는 날이면
난 괜히 엘리베이터를 한 층 더 기다렸고,
도서관 복도를 한 번 더 돌았다.
“오늘은 안 왔나 봐…”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론 계속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가을,
우리는
‘사랑’을 묻지 않기로 약속한 사람들처럼
담담하고, 조용하게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아끼는 연기를 했다.
그 연기가 때로는 진짜 같기도 했고,
어쩌면 그 자체가
우리만의 진짜 사랑이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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