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숨어 있는 마음의 지도

마루 끝 추리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숨어 있는 마음의 지도

연주는 창고에 쌓여 있던 가마니 자루를 꺼내 한참을 두들겼다. 털썩 주저앉은 먼지 속에서 나오는 묘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옛날 냄새. 아버지가 말없이 정리하던 낡은 농기구, 가끔은 그 속에 숨겨진 무엇인가를 찾기라도 하듯,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버지의 눈빛이 떠올랐다.
어쩌면, 아버지는 늘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루 끝에서 보이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언제나 똑같았다. 굽은 허리, 마른 어깨, 그리고 정적. 연주는 그 정적을 ‘무심함’이라 불렀고, 어떤 날은 ‘냉담함’이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마을에 다시 와서, 마루에 앉아 그때를 복기해 보니, 그건 오히려 조심스러움이었고, 불편한 침묵이 아닌, 말을 아끼는 마음이었다는 걸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아버지는 왜 그때 그렇게 말이 없었을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오래된 장독대 뒤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바람 때문이었을까, 고양이였을까, 아니면…

연주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 순간, 어릴 적 어느 한 여름 저녁, 마루 끝에서 누군가와 속삭이던 아버지의 모습이 퍼뜩 떠올랐다. 그날, 마당 건너편에서 본 뒷모습은 분명히 아버지였고, 낯선 남자의 실루엣이 그 옆에 있었다. 어른들의 대화는 귓등으로 흘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의 공기는 너무도 달랐다. 긴장했고, 무거웠다.

“혹시… 그 사람이 누구였을까. 왜 아버지는 밤마다 혼자 밖을 나갔던 걸까.”

연주는 손전등을 들고 마당을 돌았다. 그때 장독대 옆에 떨어진 작은 노끈과 삐죽 튀어나온 종이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바람에 찢긴 듯한 그 종이에는 연필 자국이 있었다.

‘7월 17일 밤, 마루 끝.’

단순한 낙서였을까. 그러나 연주는 그 날짜가 낯설지 않았다. 바로 미경 언니가 급히 병원으로 실려갔던 그 전날이었다.
그날 밤, 마루 끝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버지는 누구와 무슨 말을 나누었고, 왜 그런 흔적을 남긴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미경 언니의 병세는 그날 이후 급격히 나빠졌고, 아버지는 며칠 동안 말을 아예 놓아버렸었다. 연주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어쩌면 아버지도 자신을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는 너무 어렸고, 아버지는 너무 늙으셨던 건 아닐까.”

마루 끝에 다시 앉아, 연주는 눈을 감았다. 기억 속 그 여름밤, 작은 냄비에 보리차를 데우며 앉아있던 엄마의 기척도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늘 조용히 상황을 감싸 안았다. 소리를 내지 않고도 가족의 균형을 지탱하던 엄마의 태도는, 어쩌면 아버지와 같은 결의 것이었는지도.

정적 속에서 자라나는 이해. 마루 끝은 기억을 되짚는 장소이자, 감정을 재구성하는 무대였다. 그리고 연주는 이제야, 오래전 묻어두었던 감정의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보려 한다. 말로 하기엔 너무 늦은 것들이지만, 쓰는 것으로라도 남겨야 할 것들이 있다.

“아버지… 그때 당신 마음속엔 뭐가 있었던 거예요.”

이제 연주는 알 것 같다. ‘무엇을’ 찾는 추리가 아니라, ‘누구를’ 이해하고 싶은 추리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작은, 마루 끝이라는 자리에 앉는 것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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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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