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나 사이

30화“겨울 방학과 언니의 발걸음”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겨울 방학과 언니의 발걸음”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나는 집안에서 가장 작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엄마에게 가장 많은 일을 배우던 시기였다.
그 겨울은 유난히 조용했고, 또 유난히 길었다.

언니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언니가 대학보다는 취업이라는 단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아빠는 어느 날 무거운 책가방을 하나 들고 왔다.
커다란 전집이었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히는 순간, 그건 우리 집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강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책을 한 권씩 꺼내 읽었다.
어렵고 낯설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읽고 싶어졌다.
책 속에 나오는 단어들이 뿌연 안개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페이지를 덮을 때마다 내가 조금씩 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겨울 간식은 엄마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나는 그 손끝을 조용히 따라다녔다.
찹쌀을 물에 불려 인절미를 만들고,
고구마를 쪄서 으깬 뒤 단술을 만들고,
감자를 익혀 으깬 후 깨소금과 설탕을 섞은 고명도 만들었다.
그 모든 순간이 내 안에서 작은 기쁨이 되었다.

**

언니는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다.
엄마는 언니에게 새로 산 스웨터를 입혀주며
“춥겠다, 바람 들지 않게 목은 꼭 여며.”
하고 자꾸만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그날 아침 언니는 조용히 집을 나섰다.
손에는 종이 한 장.
긴장한 듯 말없이 걷는 언니를
아빠는 마당 끝까지 배웅했다.
나도 현관문 틈에서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너무 어른 같았다.

나는 장작불 옆에 앉아 전집 중 한 권을 꺼냈다.
글자가 많고, 그림은 적었다.
모르는 단어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상상력이 나를 데려갔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세계,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존재했다.

책을 읽다 말고,
나는 문득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도 내 안에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고 싶었다.
조금은 서툴고,
조금은 울퉁불퉁하더라도
진짜 내 마음을 담은 이야기.

**

겨울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 내 마음은 따뜻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눈은 조용히 쌓이고,
엄마의 음식은 향기로 집을 채우고,
아빠는 나를 바라보며 “이 책 다 읽으면 사람 되는 거야”라고 웃어주었다.

언니는 점점 어른이 되어가고,
나는 그 옆에서 천천히 나만의 겨울을 쌓아가고 있었다.
눈이 내리면 창밖을 보며 책장을 넘기고,
하루가 저물면 내 마음에도 한 페이지가 더해졌다.

그 겨울은,
언니의 발걸음과 내 성장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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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속에 길을 내듯,
나는 책장을 넘기며 내 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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