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세상과 나 사이

29화 이불속의 도서관

《이불속의 도서관》

책에 빠져 있던 그 무렵, 나는 늘 한 평짜리 나만의 공간을 상상했다.

사람이 많고 방이 좁았던 집에서 책을 읽는다는 건

그야말로 온 집안의 움직임과 숨소리를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누가 방문을 열기라도 하면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고,

누가 TV를 켜면 속으로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아무도 내게 그만 읽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빠도, 엄마도, 언니도.

나름의 눈치를 주는 일은 있었지만

누구도 내게 책을 놓으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다.


특히 아빠는 그런 점에서 무척 조용한 분이셨다.

당신은 말없이 밤 12시 전엔 내 방 불이 꺼지길 바라셨고,

난 언니가 공부를 마치고 책상 불을 끌 때까지 책을 읽다가

그다음엔 이불을 뒤집어쓰고 플래시를 켠 채 글자를 따라갔다.


손전등의 약한 불빛은 때때로 책의 글씨를 삼켜버렸고,

나는 점점 더 눈을 가늘게 뜨며 상상의 숲으로 빠져들었다.

그 순간은, 마치 내가 내 세상의 주인인 것 같았다.

이불속의 도서관, 단 한 권의 책이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갔다.


아빠는 가끔 새 전집을 들고 오셨다.

나이에 비해 너무 어려운 철학책이나 역사책도 있었지만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을 폈다.

읽어도 모르겠는 책들이었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펴게 되는 책.

이해보다는 음미하듯 읽었던 그때의 책들은

지금 내 마음 깊은 곳, 언어의 뿌리처럼 박혀 있다.


책장을 넘기며 들리던 남동생의 코 고는 소리,

언니가 노트를 넘기는 바스락 소리,

그리고 가끔 부엌에서 엄마가 물을 끓이는 소리까지.

그 모든 소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책 속 세계와 현실 사이를 잇는 다리처럼 느껴진다.


한밤중, 숨소리를 죽인 채 책을 읽다가

아빠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나는 재빨리 플래시를 끄고 숨은 듯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문도 열지 않은 채 발걸음을 돌리곤 하셨다.


그 무언의 배려가 참 고마웠다.

그렇게 나는, 아무 말 없는 이해 속에서

글을 읽고, 상상하고, 써나갔다.


그 시절의 밤,

불 꺼진 방 안의 희미한 빛 아래서

나는 어쩌면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아주 조용하고 단단한 결심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