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나 사이

32화 – 엄마의 술, 겨울의 간식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세상과 나 사이 32화 – 엄마의 술, 겨울의 간식

엄마는 술도 잘 빚으셨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겨울 햇살이 따스하게 안마당을 덮는 날이면 엄마는 솥뚜껑을 여셨다.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이 연기와 함께 피어올라, 온 동네 냄새를 사로잡았다.
그 밥을 술을 빚기 위해 식히는 날이면, 나와 동생들은 신이 났다.

“엄마, 이 밥 평소에도 이렇게 지어줘요!”

말끝마다 밥 한 주먹씩 쥐어 입에 넣으면서도 우리는 입맛을 다셨다.
사실 나는 엄마가 술을 빚는 날이 제일 좋았다. 평소보다 부엌과 안마당이 더 북적였고, 부지런히 오고 가는 엄마의 동선 안에서 온 가족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겨울 간식을 만들던 날은 늘 그랬다. 술, 인절미, 고구마엿, 조청, 누룽지까지—
그 모든 건 결코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햇살이 좋은 날, 엄마는 커다란 고무대야에 찹쌀을 퍼붓고는 “익혀야지, 살짝만!” 하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부터 우리 집은 작은 공장이 되었다.
부엌에서는 큰언니가 밥을 저었고, 나는 동생들과 함께 마당에서 술밥 식힐 천을 펼쳐 놓았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손바닥으로 넓게 펴면, 차가운 겨울바람이 자연스럽게 그 김을 잡아먹었다.

엄마는 술이 예민하다고 하셨다.
술독에 들어가는 누룩은 공기를 타고 기분을 바꾸기 때문에, 누가 큰소리만 내도 ‘술이 깨진다’고 했다.
그 탓에 우리는 하루 종일 숨죽이며 움직였다.
숨죽인 마당엔 찹쌀 냄새, 누룩 냄새, 겨울바람 냄새가 뒤엉켰고, 우리 가족의 발소리만 바삭바삭 들렸다.

그렇게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나면, 저녁이 되어서야 엄마는 커다란 뚜껑을 술독 위에 올리셨다.
그리고는 꼭 그날 밤, 평소보다 푸짐한 저녁이 차려졌다.
인절미를 자르며 고소한 콩가루가 사방에 날아다녔고, 고구마엿을 나누며 아버지는 “이게 도시락 반찬보다 낫다”라고 웃으셨다.

나는 그 시간들이 너무 좋았다.
뭔가를 함께 만드는 기쁨, 온 가족이 한 덩어리처럼 움직이는 시간,
그리고 술밥을 슬쩍 집어먹고는 엄마 몰래 입술에 찰기를 느끼던 그 장난스러움까지도.

겨울은 그렇게 깊어갔다.
눈이 내리는 날, 술독 위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도 엄마는 술을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어느 해 겨울, 엄마는 술을 빚고 난 며칠 뒤, 이웃집에 항아리 하나를 나눠주셨다.
그 술로 그 집 아들이 취업 시험에 붙었다며 한참을 고맙다 하셨다.

“우리 엄마 술은 약도 되는 거야.”

나는 뿌듯하게 동생들에게 말했다.
그 시절, 나는 그렇게 믿었다.
엄마의 손맛은 사람도 살리고, 집안의 공기도 따뜻하게 만든다고.

아직도 겨울 햇살이 비치는 날이면 나는 그 술밥 냄새를 떠올린다.
하얀 김 사이에서 엄마가 웃던 얼굴, 형제자매들이 뛰놀던 마당, 조용히 술 익기를 기다리던 술독의 숨결까지도.

그 시절, 겨울은 고요하지만 풍성했고,
무언가를 손으로 만들며 살아간다는 것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기억을 뀌메는 사람···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17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29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