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세상과 나 사이

오래된 얼굴, 낯선 마음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소제목: 오래된 얼굴, 낯선 마음
필명: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나는 오랫동안 착각하고 있었다.
현철이는 5학년 때 전학 온 줄 알았다.
어릴 적 기억이란 게 그렇다. 어떤 장면은 선명하게 남지만, 어떤 존재는 흐릿하게 스쳐가기도 하니까.
그 애는 1학년 때부터 우리랑 같은 학교를 다녔다.
같은 복도에서, 같은 교실에서, 같은 도시락 냄새를 맡으며.

하지만 나에게 현철이는 늘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아이 같았다.
존재감이 또렷해진 건, 우리가 6학년이 되던 봄이었다.
선생님 곁을 지키던 그 아이의 움직임,
교실을 조용히 다스리던 묵직한 눈빛,
그리고 운동장 위에서 날아다니던 발끝까지.
그 모든 모습이 나를 단숨에 관찰자의 자리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가만히 기억을 더듬다 보니,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그 애의 얼굴을 몇 번이나 옆에서 스쳐 보았다.

1학년 때, 복도 끝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아이.
2학년 겨울, 도서실에서 혼자 책을 읽던 아이.
3학년 여름,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걸어가던 아이.
그게 현철이었다는 걸, 나는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아마도 그 아이는 늘 ‘조용한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눈에 띄지 않는 듯하면서도, 언제나 교실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책임지고 있는 존재.
말수가 적었던 것도 아닌데, 유난히 말이 없었던 아이처럼 느껴졌고,
언제나 함께 있었던 아이인데도, 나에겐 마치 한참 뒤에 나타난 사람처럼 다가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변화한 현철이’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반장을 맡고, 선생님 곁에 있고, 우리를 이끌었던 아이.
하지만 그 모습은 시간을 쌓아 만들어진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조금씩 ‘어른의 얼굴’을 준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그 아이의 ‘처음’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같은 해, 같은 학년으로 시작했지만
누구는 점점 투명해졌고, 누구는 점점 진해졌다.

그걸 이제 와서 깨닫는다는 건,
내가 참 늦은 관찰자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시절,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놓치고 지나왔다.
눈앞의 것보다 마음의 결을 살피는 일이 서툴렀고,
말보다 표정의 무게를 읽어내는 능력도 없었다.

그러니 이제야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꿰매는 일,
그게 나의 ‘세상과 나 사이’를 잇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날 도서실에서 조용히 책장을 넘기던 그 아이가
어쩌면 그때부터, 우리를 대신해 무언가를 감당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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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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