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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세상과 나 사이

짝꿍 혜영이, 국사를 싫어했던 이유

56화. 짝꿍 혜영이, 국사를 싫어했던 이유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중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짝이 되었던 혜영이.
하얗고 바른 인상에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의 일도 척척 도와내는 혜영이는 정말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친구였다.
수업 태도도 모범적이었고, 매사에 정확했지만, 유독 국사 시간만 되면 살짝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아이는 그 시간이 싫은 걸까, 아니면 힘든 걸까.
난 처음엔 그냥 ‘재미없는 과목이겠지’ 하고 넘겼다.
하지만 수업 중 고개를 약간 숙이거나, 책상에 손을 모으고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혜영이는 늘 완벽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런 작은 흐트러짐 하나도 유난히 커 보였던 것이다.

국사 선생님은 교무실에서도 꽤 엄격한 분으로 소문나 있었다.
진도 나가는 것도 빠르고, 질문도 많이 하고, 틀린 학생에게는 큰소리를 내기도 하는 그런 선생님이었다.
혜영이는 그 선생님의 질문에도 조용히 정답을 말하곤 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 국사 선생님이 혜영이 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

그날도 국사 시간이었고, 선생님은 지난 시간에 배운 고려시대 역사를 짚으며 칠판에 큰 글씨로 ‘무신정변’을 쓰고 계셨다.
문득 선생님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려 질문을 던졌다.

“임혜영, 무신정권 시기 대표적인 집권자를 말해보게.”

교실 안은 조용해졌고, 나도 살짝 긴장했다.
혜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을 바라봤다.
입을 열어 정답을 말하면서도 얼굴에는 미묘한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정답을 말한 뒤 앉는 그녀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는 걸 나는 보았다.

쉬는 시간, 나는 용기 내어 물었다.

“혜영아, 혹시 국사 시간 별로 안 좋아해?”

혜영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응, 별로 안 좋아해. 우리 아빠가 가르치니까.”

그 짧은 대답 속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말은 짧았지만, 그 표정에서 오랜 시간 쌓여온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국사 선생님이라면, 혜영이는 누구보다 국사 과목에 익숙해야 하고,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말투와 표정 하나까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교실에서 그 모든 것을 다시 마주하는 건 결코 편안한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인 혜영이에게 ‘선생님의 딸’이라는 타이틀은 쉽게 벗을 수 없는 껍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실수하면 안 되고, 모범이 되어야 하고, 친구들에게 창피한 모습은 보여선 안 되고…
그런 압박이 매 수업마다 쌓였을 것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국사 시간이면 혜영이의 얼굴을 더 자주 살피게 되었다.
어떤 날은 말없이 책을 넘기다가 조용히 창밖을 보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도 함께 창밖을 바라보며 혜영이 마음을 상상해보곤 했다.

어느 날 점심시간, 혜영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미순아, 너는 어떤 과목 제일 좋아해?”

“음… 나는 국어? 그리고 미술 시간. 그냥, 편해서.”

“나도 옛날엔 국사 좋아했어. 아빠가 옛날이야기처럼 해주던 시절에는.”

그 말이 왠지 슬프게 들렸다.
그 시절이라는 말속에, 사라져 버린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교과서 속 이야기를 들려주던 시간이, 교단에서 학생들을 꾸짖는 시간이 되어버렸을 때.
혜영이의 국사는 그렇게 멀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혜영이를 이해하고 싶었다.
완벽한 줄로만 알았던 아이에게도 말 못 할 부담과 상처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 시야도 조금 넓어졌다.
모든 친구가 겉으로 보이는 대로만 사는 건 아니라는 걸 그 나이에 처음 느꼈던 것 같다.

혜영이는 내 짝으로 한 학기를 함께했고, 우리는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시절, 마음을 조금씩 열며 친구가 되어간 그 따뜻한 과정이 내겐 큰 위안이었다.
중학교라는 새롭고 낯선 세계에서, 혜영이는 나의 짝이자 작은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 뒤로도 국사 시간엔 가끔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곤 했지만,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았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배려했고, 말없이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건 어쩌면, 중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 또 다른 우정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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