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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골목

67화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제67화 – 엄마의 단어장

엄마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한 건
숫자 공부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였다.

“엄마, 이제 한글도 배워볼까?”

엄마는 웃으시며 고개를 흔드셨다.

“아이고야, 나는 그런 건 머리에 안 들어온다.
하루 종일 일하고 오면 눈이 감겨.
한 글자 보면 졸려.”

그 말에 나도 처음엔 괜한 욕심을 부렸던 걸 반성했다.
그땐 내가 배운 순서대로
‘가, 나, 다’부터 시작했었다.
받침이 있고 없는 글자,
이응이 어떤 소리인지…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쏟아부었다.

엄마는 피곤한 눈으로 공책을 보다 말고
자꾸 냄비를 뒤적이고
대야에 담긴 고추를 뒤적이셨다.

한글보다 당장 삶이 먼저였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엄마에게 지금 필요한 단어부터 알려드리기로.

“엄마, 버스 정류장에 붙은 동네 이름은 알아야 하니까
우리 동네 이름부터 써볼까?”

그렇게 ‘마전’, ‘도심’, ‘장터’ 같은
엄마가 자주 가는 곳의 이름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 이름’, ‘아빠 이름’
그리고 ‘우리 집 주소’
‘할머니’ ‘된장’ ‘미숫가루’ 같은
엄마의 일상 속 단어들.

엄마는 필요한 단어만큼은
기억하려고 애쓰셨다.
잘 외워지지 않으면 나에게 물어보셨다.

“야, 장터는 ‘장’에 뭐였더라?
꼬불꼬불한 거 밑에 있는 거?”

“엄마, 그건 ‘터’야. 이렇게 써.”

“아하… 이게 ‘터’ 구나…”

내가 한글로 써서 보여주면
엄마는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셨고,
종이에 써서 확인하시곤 했다.

나도 엄마가 쉽게 보게 하고 싶어서
부엌 찬장, 문간방 기둥, 화장실 문,
심지어 벽시계 아래에도
종이에 써 붙이기 시작했다.

‘된장’, ‘소금’, ‘쌀’, ‘물’, ‘신발’, ‘장날’

엄마는 그것들을 보고
혼잣말로 조용히 읽어보셨다.
처음엔 어려워하시더니
자주 마주치는 단어는
금방 익히셨다.

“야, 이거 보니까 좋네.
맨날 보니까 외워지더라.”

엄마는 **주방에 붙은 '된장'**을 보며 웃었고
장터 갔다 오는 버스 안에서도
버스 유리창 너머 간판의 글자를
눈으로 따라 읽으려 애쓰셨다.

“근데 말이야, 요즘은 뭘 사도
다 글씨가 적혀 있어서,
글씨를 모르면 하나도 모르겠더라.”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글씨 없는 세상은 없다고.
이제는 눈으로만 외우는 세상은 끝났다고.

“나는 왜 학교를 못 갔을까.
그때 그냥 다녀볼걸 그랬다.”

엄마의 한숨에
내 가슴도 조용히 저려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엄마는 이제부터 배우는 중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누구보다도 단단하고, 진지하다.

어느 날, 엄마가 마당에 나와
혼잣말처럼 말하셨다.

“그런데 말이야,
‘엄마’라는 글자가 젤 예쁘더라.”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좋았다.
엄마가 자기 이름을 한글로 쓰기 시작한 날.
그리고 ‘엄마’라는 단어를 제일 먼저 마음에 새긴 날.
그 모든 날이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빛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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