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끝일기 25화

크고 달아 보이는 수박이 익다 못해 터져 버렸다

2025년 8월 9일 보슬비

크고 달아 보이는 수박이 익다 못해 터져 버렸다

새벽 공기가 아직 서늘한 시간, 눈이 번쩍 떠졌다.
벽시계 바늘이 4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용히 부엌 불을 켜고, 어젯밤 미리 씻어 둔 쌀을 밥솥에 안쳤다.
채소 냄비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계란 프라이를 굽자 고소한 향이 부엌에 퍼졌다.
식탁 위에 접시를 가지런히 놓고 나니 시계는 정확히 5시를 가리켰다.

원래는 평일에도 이른 새벽에 밭에 나가는 편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조금은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졌다.
한여름의 무더위, 장마의 불규칙한 비,
그리고 하루하루 쌓이는 집안일들이
“주말에만 가도 괜찮아” 하고 속삭였다.
그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게 오늘의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차를 몰고 괴산으로 향하는 길,
하늘은 낮게 드리운 구름으로 가득했다.
보슬보슬 내리던 비는 잠시 굵어졌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리듬처럼 이어졌다.
햇빛은 가려져 있었고, 공기는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땀을 흘리며 밭일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밭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모기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볼을 톡 쏘아 올리고는 날아가 버렸다.
따끔함이 올라오자마자 퇴치제가 있는 차로 달려갔다.
팔, 다리, 목덜미, 심지어 손목까지 구석구석 뿌렸다.
퇴치제 특유의 알싸한 화학 냄새가
빗물 냄새와 섞이니 묘하게 시원한 향이 풍겼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수박밭.
넝쿨 사이로 조심조심 발을 옮기는데,
그 사이사이로 드러난 수박들이 눈에 들어왔다.
줄무늬가 선명하고, 표면은 매끈하며,
살짝 두드리면 ‘통통’ 하고 속이 꽉 찬 소리가 난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껍질이 찢어진 채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속살 사이로 빗물이 고여 있었고,
달콤한 향을 맡은 벌레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시큼하게 발효된 냄새가 스쳤다.
아, 수요일쯤에 왔어야 했다.
저번에 표시해 두었던 크고 잘 생긴 수박 중
무려 열세 개가 썩어 있었다.
손으로 살짝 눌러보니 껍질이 힘없이 움푹 들어갔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무너졌다.

하지만 남은 수박들은 단단했고,
겉껍질에 빗방울이 맺혀 보석처럼 반짝였다.
칼을 꺼내 꼭지 부분을 살짝 잘라보니
안쪽은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그래, 넌 아직 괜찮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땄다.

수박을 한쪽에 모아두고 옥수수밭으로 향했다.
비에 젖은 잎사귀가 바짓단을 스쳤다.
옥수수수염은 갈색으로 완전히 마른 상태였고,
껍질을 살짝 젖히니 노란 알갱이가 빼곡히 들어찼다.
손톱으로 톡 건드리면
맑고 달콤한 즙이 맺혔다.
하나씩 꺾어 바구니에 담는 소리가
‘뚝, 뚝’ 경쾌하게 이어졌다.

호박밭은 마치 덩굴 정글 같았다.
잎이 크고 두꺼워서,
그 사이에 숨어 있는 호박은
마치 보물찾기 하듯 찾아야 했다.
덩굴을 살짝 들어 올리니,
둥글고 단단한 호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들자 묵직한 무게가 그대로 전해졌다.

토마토밭으로 옮겨가니
빨갛게 익은 토마토들이 가지마다 매달려 있었다.
빗물에 씻겨 더 선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손끝에 닿자마자 ‘톡’ 하고 떨어지는 그 감촉,
그리고 그 순간 스치는 신선한 향.
몇 개는 그대로 입에 넣어 한입 베어 물었다.
껍질이 터지며 퍼지는 달콤하고 산뜻한 맛에
피곤함이 조금 사라졌다.

수확물만 챙기는 데도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잡초와의 전쟁.
밭 한쪽을 보니 풀들이 무릎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순간, 제초제를 뿌리고 싶은 마음이
치밀게 솟았다.
하지만 나는 되도록이면
자연 그대로 먹고 싶었다.
그 마음이 낫을 집게 했다.

허리를 숙이고 풀을 하나씩 베어 나갔다.
풀잎이 쓰러질 때마다
싱그러운 냄새가 퍼졌다.
낫이 풀 줄기를 ‘삭’ 하고 베는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섞여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비 덕분에
그 땀이 금세 식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빗방울이 스며들었고,
목덜미로 한 줄기 물이 타고 흘렀다.

낫질을 멈추고 서서 밭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훨씬 단정해진 모습.
풀들이 치워진 자리엔
토양의 갈색이 드러나 있었다.
마치 숨을 고르는 사람처럼,
밭도 나도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오늘의 수확물은
갓 딴 수박 몇 통,
옥수수 바구니 하나,
통통한 호박 몇 개,
잘 익은 토마토 몇 봉지.
양손 가득 무겁게 들고 차로 향하면서도
썩어버린 열세 개의 수박이
머릿속에서 계속 아른거렸다.

게으름은 이렇게 흔적을 남긴다.
다음번에는 그 아쉬움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켜자
와이퍼가 유리창의 빗방울을 밀어냈다.
길가엔 풀잎마다 빗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멀리 산자락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오늘 하루의 교훈을 곱씹었다.

밭에서 얻는 건 단지 채소나 과일이 아니다.
그 속에는 나 자신에 대한 작은 경고와 다짐,
그리고 계절이 주는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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