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끝일기 26화

큰길 우선, 마음의 길 우선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마루끝일기 26화

큰길 우선, 마음의 길 우선

2025년 8월 9일.
아침 햇살이 도로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오늘은 혼자였다. 차창 밖으로 밀려가는 풍경이, 오늘따라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같은 길이어도 마음 상태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다. 어떤 날은 끝없이 펼쳐진 길이 자유로워 보이고, 어떤 날은 막막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그 중간쯤이었다.

내비게이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려왔다.
“큰길 우선으로 안내합니다.”
그 말이 왜 이리 오래 남는 걸까. ‘큰길 우선’이라니, 어쩐지 내 인생의 방향을 점검하라는 신호처럼 들렸다. 사람은 누구나 큰길을 따라가면 안전하고 빠르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 마음이 가리키는 길은 종종 그와 반대였다. 작은 골목, 가파른 언덕,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글을 쓰는 일도 그렇다. 누구나 가는 큰길보다,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고집하고 싶다.

요즘 나는 글쓰기에 푹 빠져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늘 쓸 이야기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전날 적어둔 문장을 다시 읽는다. 거기에 손끝이 반응하면, 그날은 좋은 날이다.

내가 특히 마음을 쓰게 되는 건, 당신의 자서전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평소에도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라,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깊이 빠져든다. 그들이 웃을 때, 내가 웃고, 그들이 한숨 쉴 때, 내 가슴도 덩달아 무거워진다. 그러다 문득 ‘그들이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라는 상상이 문장으로 번져간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부드럽게 녹아드는 순간이다.

그리고, 아무도 몰랐던 사랑 이야기.
그땐 그게 사랑이란 걸 몰랐다. 그냥 선배가 나를 안쓰럽게 여겨 길 안내를 해준다고만 생각했다.

그 여름,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은 늘 뜨거웠다. 버스는 제시간에 오지 않았고, 나는 그늘이 없는 표지판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그때였다.
“미순아, 오늘도 버스 안 와?”
낯빛이 햇볕에 그을린 선배가 웃으며 다가왔다. 하얀 셔츠 목덜미가 약간 젖어 있었다.
“네… 오늘따라 더 늦네요.”
“그럼 같이 걸을래? 저쪽 골목으로 가면 지름길이야.”

그렇게 시작된 걸음. 골목에는 장맛비에 젖은 흙냄새와, 담장 너머 핀 접시꽃이 피어 있었다. 선배는 내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네 집, 여기서 멀지?”
“한… 이십 분쯤 걸려요.”
“그럼 매일 이렇게 가. 버스 기다리는 것보다 낫잖아.”

나는 그 말이 그냥 친절이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 선배는 종종 내 버스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나타났다. 하루는 장맛비가 쏟아졌고, 내 우산은 바람에 뒤집혔다. 선배는 말없이 자기 우산 안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괜찮아. 내 옷이 젖으면 되지.”
그 말이 왜 그땐 아무렇지 않게 들렸을까. 지금은 그 목소리의 온도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50이 훌쩍 넘은 지금, 문득 그 시절을 돌이켜본다.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사실은 나를 향한 사랑이었다는 걸 이제야 안다. 그 마음을 그때 알아채지 못한 게 아쉽다.
다시 그 선배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땐 몰랐어요. 하지만 당신의 마음이 제게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 이제는 압니다. 고마워요.”

또 하나, ‘백일의 약속’. 이 이야기는 아빠의 삶에서 출발했다. 어린 시절, 아빠가 무심하게 건넨 한마디, 혹은 오래전 들었던 가족의 이야기 조각들이 모여서 한 편의 소설이 됐다. 그 과정을 겪으며 깨달았다. 누군가의 인생을 쓰는 일은 그 사람의 심장을 잠시 빌려 사는 일이라는 것을.

문제는, 하나의 주제가 떠오르면 나는 며칠이고 잠을 설치게 된다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도 문장과 장면이 머릿속에서 이어진다. 대사를 중얼거리다 보면 눈꺼풀이 무거워지지만, 그 순간 번쩍 떠오르는 한 줄 때문에 다시 불을 켠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 온 세포를 자극하는 것 같아서, 도저히 멈출 수 없다.

오늘의 고속도로는 평소보다 덜 막혔다. 큰길 우선이라는 안내 덕분일까. 아니면 내 마음이 조금은 단단해졌기 때문일까.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 속에서 나는 다음 글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그 문장이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는 모르지만, 분명 오늘의 이 길처럼, 언젠가는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아마도 나는 계속 이 길 위에 있을 것이다. 큰길이든 작은 길이든, 내 마음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며.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이야기들을, 내 언어로 남겨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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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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