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내 봄에 들어왔을 때〉

제1화 ― “처음의 말풍선”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제1화 ― “처음의 말풍선”

2021년 4월. 벚꽃 잎이 거의 다 떨어진 교정은 햇살에 반짝였다. 캠퍼스 잔디밭 위로 앉아 있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섞여 흘러왔다.

윤호는 강의실 구석 창가에 앉아, 태블릿에 펜을 쥔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건 여전히 힘들었다. 그래서 수업이 시작되기 전, 그는 늘 혼자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채웠다.

펜 끝에서 나오는 건, 눈이 퀭하게 파인 남자의 얼굴이었다. 마치 모든 걸 잃은 듯한 표정.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무겁게 만드는 그림.
“또 너무 어둡네.”
그는 스스로 중얼거렸다. 마음 한구석을 어떻게든 풀어내야만 하는데, 그게 늘 이런 그림으로 나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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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는 97년생. 올해 스물다섯이었다. 세 번의 입시 실패 끝에 겨우 들어온 이 지방대 만화창작학과 2학년.
사실 그는 이미 여러 번 포기하고 싶었다. 공황장애 때문에 정신과 상담도 받았고, 불안 때문에 시험장에 들어가기조차 힘들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기어이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만의 웹툰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잘생겼다’라는 말은 종종 들었지만, 그것이 위로가 되진 않았다. 키 178에 건강한 체형. 겉으로 보면 자신감 넘쳐 보일지 몰라도, 사실 그는 무리 속에 섞이는 게 가장 두려웠다. 사람들 속에서 호흡이 가빠지고, 손끝이 떨렸다. 그래서 친구는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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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알림.

“안녕하세요. 혹시 그림 올리신 거 보다가 궁금해서요.”

프로필 사진 속엔 귀여운 고양이 그림이 있었다. 닉네임은 ‘은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윤호는 눈썹을 찡그리며 채팅창을 열었다.

그녀는 자신을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대학 새내기라고 소개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입학했어요. 아직 잘 모르지만, 언니 오빠들한테 배우면서 열심히 해보려고요.”
말투에는 특유의 밝음이 배어 있었다. 윤호는 잠시 망설였다. 원래라면 이런 메시지에 대답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그림을 보고 연락했다는 말에, 무언가 마음이 흔들렸다.

“제 그림을요?”
윤호는 짧게 물었다.

“네!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좀 무섭기도 했는데,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그림에서 그런 감정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것 같아요.”

윤호는 가만히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 자신의 어두운 그림을 이렇게 받아준 건 처음이었다. 대부분은 ‘우울하다’ 거나 ‘이상하다’라는 반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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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의외로 길게 이어졌다.
은별은 2001년생, 이제 스무 살. 윤호보다 네 살 어렸다. 대학은 애니메이션 특화로 유명한 곳이었고, 첫 입시에 합격했다고 했다.

“대단하다. 나는 삼수했는데.”
윤호가 솔직히 말하자, 은별은 바로 답했다.
“삼수라도 들어왔다는 게 더 대단한 거 아닌가요? 전 그냥 운이 좋았던 거 같아요.”

화면을 바라보며 윤호는 피식 웃었다. ‘운이 좋았다’라는 말이 그녀에게서 나오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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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윤호는 침대에 누워 은별과의 대화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혹시… 내 그림을 진짜로 좋아해 준 걸까?’
다시 떠올리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를 흔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밀려왔다.
‘만약 내가 더 대답을 못하면, 혹은 어색하게 만들면?’
불안이 목을 조였다. 그래도 그는 알람을 맞추고, 내일도 그녀의 메시지를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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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더 자주 대화를 나누게 됐다.
학교 수업 얘기, 과제 얘기,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차이에 대한 토론까지. 은별은 생각보다 진지했고, 동시에 웃음도 많았다.
“언젠가 오빠 그림이랑 제 애니메이션이 만나면 멋질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윤호는 처음으로 ‘미래’를 함께 상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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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4월의 어느 날. 은별이 먼저 말했다.
“우리, 직접 만날래요?”

순간, 윤호의 손끝이 떨렸다.
만남이라니. 사람을 직접 보는 건 아직도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설렘이 몰려왔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래. 만나자.”

그렇게, 윤호의 봄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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