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끝일기

9월 3일,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길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마루끝일기 – 9월 3일,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길

남편은 새벽같이 눈을 비비며 출근 비행기를 탔다. 공항까지 바래다주고 오면서, ‘나도 곧 육지로 돌아가야 하는데…’ 싶으면서도, 괜히 그 짧은 공항 이별이 오래 남는다. 내가 손을 흔들 때, 남편은 늘 그렇듯 고개만 까딱하며 성큼성큼 게이트로 들어가는데, 그 뒷모습을 보면 꼭 드라마 주인공 같다. 물론 현실은 출근길 직장인 모드라 카리스마 대신 다소 찌뿌둥한 어깨지만.

집으로 돌아오니 비어 있는 집이 괜히 넓어 보였다. 이럴 땐 묘하게 기운이 빠진다. 하지만 기운이 빠져도 집안일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동안 미뤄뒀던 집안 정리를 시작했다. 쌓아둔 빨래와 구석구석 쌓인 먼지가 나를 향해 “오늘 아니면 우리, 영영 자리 차지할 거야~” 하고 비아냥거리는 듯했다.

가장 큰 과제는 역시 이불 빨래였다. 여름 내내 땀을 머금고 있던 이불은 무게만 해도 반쯤은 덤벨 수준. 빨래통에 넣고 나니, 마치 이불이 나를 집어삼키는 듯, ‘나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하는 복수심을 품은 것 같았다. 세탁기가 돌기 시작하자 집 안 가득 물소리가 퍼지는데, 그 소리가 왜 이렇게 기특하고 안심되는지. 마치 한 학기 내내 놀다가 기말고사 전날 벼락치기 하는 대학생이 ‘그래, 나 이제 공부 좀 해볼까’ 하고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빨래를 널고 집안을 훑고 나니 오후가 훌쩍 와 있었다. 창문을 여니 바람에 햇살이 부서지고, 멀리 공항 쪽에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가 나를 재촉하는 듯했다. 오늘 오후 나는 다시 육지로 돌아가야 했다. 제주 생활의 묘미는 이런 것 같다. 올 때는 설레고, 있을 땐 고단하고, 떠날 땐 아쉽다.

짐을 챙기며 냉장고 속 반쪽 남은 수박을 보다가 잠시 망설였다. ‘이걸 들고 가야 하나?’ 그러나 이성을 되찾았다. 수박 반통을 들고 비행기를 타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로맨틱하지 않고, 오히려 예능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결국 냉장고 정리도 대충 끝내고, 가방을 둘러멘 채 집 문을 닫았다.

공항으로 가는 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제주의 하늘은 언제나 특별하다. 오늘따라 더 파랗게 느껴졌다. 마치 “또 올 거지?” 하고 묻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응, 또 올게. 근데 올 땐 꼭 일기예보 확인하고 올 거야.” 지난번 땀과 눈물로 범벅된 제초제 작업을 생각하니, 이번만큼은 날씨를 믿고 싶진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 탑승구 앞에 앉으니, 갑자기 이상한 여유가 밀려왔다. 아침엔 남편이 떠났고, 낮엔 이불과 전쟁을 했고, 지금은 다시 내가 떠날 차례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짧은 대기 시간이, 마치 삶의 쉼표 같다.

비행기 창가에 앉아 제주 바다가 점점 작아지는 걸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곱씹었다. 남편은 회사로, 나는 육지 집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날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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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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