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일, 맑은 뒤 비
마루끝일기 – 2025년 9월 2일, 맑은 뒤 비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기 전에 서둘러 퀴위밭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농사일은 ‘오늘 아니면 안 된다’는 다급한 마음이 앞선다. 남편과는 이미 “예초기는 이제 그만하자”는 합의를 본 터라, 오늘은 제초제가 우리의 주 무기였다. 사실 예초기를 돌릴 때마다 팔이 빠질 듯 아프고, 기계는 또 왜 그렇게 제멋대로 심술을 부리는지. 그래서 둘 다 암묵적으로 “차라리 제초제가 낫겠다” 하고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퀴위밭에 도착해 둘러보니, 다행히 울창한 키위넝쿨이 양산처럼 밭을 덮고 있어 풀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순간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고구마와 호박을 심어둔 밭을 보는 순간 다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풀들이 벌써 이리저리 세력을 확장하며, 마치 “여기가 내 집이다!” 하고 외치는 듯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울타리 너머에서 원정까지 나온 풀들을 보며 ‘이 녀석들, 진짜 밭을 통일하려는 거 아냐?’ 싶었다. 결국 제초제 한 통을 거의 다 비워내며 풀과 맞짱을 떴다.
귤나무 밭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풀이 귤나무 줄기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애틋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질식 작전이었다. 귤나무가 ‘숨 좀 쉬자’ 하고 헐떡이는 것 같아, 서둘러 풀들을 제치고 빈 공간에 제초제를 뿌렸다. 귤나무가 없는 곳에만 조심스럽게 뿌려야 하니 허리도 구부정하고 땀은 비 오듯 흘렀다.
다음은 감귤밭. 큰 귤나무들이 늘어선 풍경은 보기 좋았지만, 가까이 가니 칡넝쿨이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타 있는 게 아닌가. 줄기를 잡아당기는데, 이 녀석들 끈질기기로 치면 아마존 원주민도 울고 갈 판이다. 한참을 씨름하다 보니 팔은 후들거리고, 머리 위에서 칡넝쿨이 툭툭 떨어질 때마다 머리카락 사이로 잎사귀가 파고들었다. 한 시간 넘게 그 넝쿨을 뜯어내며 ‘나는 전문 농부도 아닌데 왜 이런 고생을 자처하나’ 싶었다. 그래도 묘하게 뿌듯한 마음은 들었다. 나무가 홀가분해진 듯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데, 그 모습에 내 고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버티며 밭을 전전하며 제초제를 뿌렸건만, 참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마지막 밭에서 나와 땀을 씻어내고, 샤워까지 마친 순간—하늘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졌다. 그동안 쏟아낸 땀이 빗물에 다 씻겨 내려가는 기분. 마치 열심히 시험공부를 했는데 시험지가 바뀌어 버린 듯한 허탈감이었다.
이쯤 되니 이번 달의 제주 농사는 그냥 다음 달로 미뤄야겠다고 체념했다. 애써 농부 흉내를 내봤지만, 하늘이 ‘넌 아직 멀었어’ 하고 타이르는 듯했다.
오후엔 도저히 또 노동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제주까지 와서 삽질만 하다 갈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차를 몰아 함덕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바다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흩뿌리던 빗방울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추고 하늘은 맑아졌다. 역시 제주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농부를 울렸다 웃겼다, 들었다 놨다 한다.
함덕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바다는 한없이 파랗고, 모래사장은 햇볕을 머금어 반짝거렸다. 발만 살짝 담그려 했는데, 파도가 장난치듯 철썩—하는 순간 바지가 흠뻑 젖어 버렸다. 나는 허둥지둥 뛰어나오며 “아니, 이건 바다의 환영 세리머니냐” 중얼거렸고, 남편은 뒤에서 배꼽 잡고 웃었다.
모래사장에 앉아 젖은 바지를 말리며 바다를 바라보니, 오늘 하루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졌다. 아침부터 제초제 들고 풀과 싸우다, 비에 허망해지고, 오후엔 파도에 허벅지를 적시며 웃게 되는 하루. 결국 제주가 내게 주는 선물은 ‘다음 달에도 또 오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담달엔 꼭 일기예보 확인하고 오자.”
나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남편은 “당신이 확인해도 소용없을걸. 제주 날씨는 자기 마음이 있잖아” 하며 웃는다. 그 말에 나도 결국 같이 웃고 말았다.
노동과 허무, 그리고 위로까지—오늘 하루는 제주가 내게 건네준 작은 교훈이었다. 농사도 인생도 내 맘대로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웃을 거리가 생기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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