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끝 일기

단호박들의 축제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마루끝일기 – 2025년 8월 23일, 토요일. 맑음

아침 일찍 괴산 밭으로 향했다. 공연 끝나고 가져온 합판과 각재목을 권사장님 댁에 내려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웃의 난로가 올겨울 더 따뜻해질 거라 생각하니, 덩달아 내 마음에도 따스한 불길이 이는 듯했다.

단호박의 작은 기적

밭에 들어서자, 저번 주에 심어 두었던 단호박 씨앗들이 반겨주었다.
대략 예순 개를 심었는데, 그중 삼십 개가 새싹을 틔운 것이다. 반 정도면 농사 성적표 치고 나쁘지 않다. “반타작이면 성공이지!” 스스로에게 합격점을 주며 새싹들을 내려다보는데, 왠지 모르게 교실에서 출석을 부르는 선생님 마음이 되었다. “응, 넌 나왔구나. 넌 아직이네? 그래, 천천히 해도 괜찮아.”

더 놀라운 건, 다 죽은 줄 알았던 단호박 열매가 세 개나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 느낀 건 단순히 반가움이 아니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가 불쑥 나타나 “나 아직 살아 있어!” 하고 손 흔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호박이 이렇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채소였던가. 괜히 괴산 단호박 축제를 내가 먼저 열어야 할 것 같은 기세였다.

오늘의 밭일, 오늘의 나

본래 계획대로 김장배추 고랑도 만들었다. 비닐을 씌울까 고민하다 결국 ‘안 씌우기’를 택했다. 대신 밭 아래쪽에 얕은 두덕을 둘러 풀도 덜 올라오게끔 했다. 흙 묻은 손으로 허리를 펴고 고랑을 바라보니, 잠시나마 나는 밭 디자이너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늦은 밤, 호박수프의 반전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니, 온종일 피곤했던 몸을 달래주는 건 의외로 남편의 한마디였다.
“여보, 호박수프… 이거 완전 호텔 조식인데?”

나는 순간 멈칫했다.
“호텔 조식?”
남편이 이어서 말한다.
“응, 그 호텔 말이야. ‘호박스프 호텔’. 당신만 가야 맛볼 수 있는 곳.”

순간 피식 웃음이 터졌다. 칭찬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이지만 어쨌든 마음은 따뜻해졌다. 사실 나는 만들면서 손도 데이고, 믹서기에 튀는 호박에 흠칫 놀라기도 했는데, 남편은 그걸 한 그릇 뚝딱 비우며 감탄을 늘어놓는 것이다.

“여보, 이 정도면 내가 요리사가 아니라 호박 마술사 같지 않아?” 하고 내가 너스레를 떨자, 남편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오늘 하루의 피곤이 눈 녹듯 사라졌다.


---

오늘의 결론

밭에서는 단호박 새싹이 반짝이며 생명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집에서는 남편의 농담 섞인 칭찬이 마음을 위로한다. 씨앗 하나에도, 말 한마디에도 이렇게 웃음이 번지는 걸 보면, 인생이란 결국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호박에게도, 그리고 남편의 엉뚱한 칭찬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하루였어.”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기억을 뀌메는 사람···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170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29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매거진의 이전글마루끝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