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3일
2025년 8월 23일, 토요일. 맑음
아침 햇살이 유난히 선명했다.
오늘은 밭에 갈 준비를 하며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눈에 밟히는 게 하나 있었다. 계단 한편에 놓여 있던 단호박과 늙은 호박들. 그중 작은 늙은 호박 하나가 수상쩍어 보였다.
겉은 멀쩡했다.
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니, 아래쪽에서 진물이 흥건히 스며 나오고 있었다. 손으로 살짝 눌러보니 껍질 안쪽은 이미 거의 다 문드러져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곧장 버렸다. 썩은 것을 붙잡고 있어 봐야 더 퍼질 뿐. 대신 제일 크고 단단한 호박 하나만 남겨두고, 단호박 두 개와 늙은 호박 두 개를 골라 삶을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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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껍질과의 씨름
저번엔 호박을 통째로 삶아 껍질을 벗겨냈는데, 오늘은 급한 마음에 소분하면서 껍질을 벗겼다.
호박 껍질 벗기기는 영 재미난 일이 아니다. 칼이 미끄러지면 손을 다칠까 긴장되고, 호박은 생각보다 질기다. 그러다 결국 손끝이 살짝 베이기도 했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 과정이 싫지만은 않았다.
껍질을 벗길 때마다 내 안의 번잡한 생각도 한 겹씩 벗겨지는 것 같았다. 마치 오늘 호박으로 내가 만들려는 무언가처럼, 나 또한 조금은 새로운 맛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스쳤다.
큰 솥에 물을 붓고, 소금을 살짝 넣었다. 껍질이 벗겨지는 대로 호박 조각들을 솥 안으로 던져 넣었다. 어느새 밭에 가려던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부엌 안에서 호박에 푹 빠져 있었다. 큰아들은 운동하러 나갔고, 나는 호박과 씨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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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이 익어가는 시간
시간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흘렀다.
호박이 익어가듯, 나의 기다림도 익어갔다. 드디어 믹서기의 도깨비방망이를 들고 냄비 안에서 호박을 갈아내자, 부드러운 노란빛이 퍼져 나왔다. 단호박이 섞여서인지 끓을 때마다 톡톡 튀어 오르며 장난꾸러기처럼 날아들었다.
나는 설탕을 한 줌 넣고, 우유 한 팩을 부었다. 한 번 더 저으니 주방 가득 고소하면서도 달큼한 향이 퍼졌다. 탁탁 튀며 끓어오르는 소리에 순간 겁이 나 불을 꺼버렸다. “다 익었겠지.” 스스로 위로하며 뚝배기를 내려놓았다.
냉동실에서 팥빙수용 찹쌀떡 세 봉지를 꺼내 호박수프에 넣었다. 노란 물결 속에 하얀 떡이 둥둥 떠 있는 모습은 마치 작은 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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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숟갈의 순간
참지 못했다.
그냥 그대로,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에 한 숟갈 퍼 담았다. 숟가락을 입에 넣자, 뜨거운 기운과 함께 달큼하고 고소한 맛이 혀를 감쌌다.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아, 이건 최고다.”
누가 들어줄 리도 없는 말이지만,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해 본다.
썩은 호박 하나를 버리고, 단단한 호박들을 정성껏 삶아 얻은 오늘의 한 그릇. 그건 단순한 수프가 아니라, 작은 깨달음의 맛이었다.
겉은 멀쩡해도 속이 문드러져 있을 수 있다는 것.
힘들게 껍질을 벗겨내야만 알 수 있는 속살의 진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나야 만 만들어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맛.
오늘 나는 호박 속에서 삶을 보았다.
어쩌면 사람도, 인생도, 이 호박죽처럼 기다림과 손길, 그리고 조금의 용기가 있어야 완성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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