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끝일기

2025년 8월 22일, 금요일. 뜨겁게 맑음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마루끝일기 – 2025년 8월 22일, 금요일. 뜨겁게 맑음

아침부터 뜨겁게 맑았다. 햇볕은 벌써 한여름을 넘어선 것처럼 강렬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마치 오늘은 뭐라도 하나 이뤄내야 할 것 같은,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날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성수동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막내아들 하루가 형과 함께 지난해 오픈한 지하 스튜디오, 이름하여 **〈하루문 스튜디오〉**다.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하루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공간인가, 아니면 하루마다 다른 이야기가 열리는 문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어쨌든 우리 집의 막내아들 이름 ‘하루’와 참 잘 어울린다.

며칠 전부터 마음에 걸린 것이 있었다. 더운 여름 탓인지, 스튜디오가 점점 창고 같은 모습이 되어간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여름엔 잘 내려가 보지 않았는데, 오늘은 아예 작정하고 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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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혼돈, 혹은 그냥 어수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발을 옮겼을 때, 나는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아, 이게 바로 예술가의 공간이구나.’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지 않았다면, 아마 첫마디가 ‘아이고, 이게 뭐니’였을 것이다.

촬영 장비, 삼각대, 각종 조명, 한쪽에 아무렇게나 쌓인 박스들, 그리고 대체 어디서 주워왔는지 알 수 없는 소품들이 스튜디오를 점령하고 있었다. 창조적 혼돈, 예술가적 자유로움… 멋진 말로 포장할 수 있지만, 내 눈엔 그냥 어수선했다.

“엄마, 오늘 촬영 없어요. 편하게 계세요.”
하루가 내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속으로 ‘편하게 있으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사실 이런 순간이 오히려 내 손이 가장 근질거릴 때다. 이왕 온 김에, 오늘 하루 종일 이곳을 정리해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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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분 노동, 오십 분 휴식

결심은 원대했으나 현실은 늘 다르다. 지하 스튜디오 안은 생각보다 더 더웠고, 잡동사니는 생각보다 더 많았다. 열심히 상자를 옮기고, 먼지를 털고, 필요 없는 물건을 모으다 보니 십 분도 채 안 돼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복을 입고 올 걸.”
혼잣말을 하며 부채질을 하다가, 나는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아버렸다. 그리고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열고 몇 줄 쓰다 보니 어느새 뉴스에 귀가 쏠리고, 그러다 ‘아, 이건 팔아야지’ 싶은 물건들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오늘의 공식은 단순했다.
“십 분 노동, 오십 분 휴식.”

이 리듬이 어쩐지 내 몸에 딱 맞았다. 땀은 식고, 마음은 정리되고, 스튜디오는 아주 조금씩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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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마켓, 작은 성취감

안 쓰는 조명, 오래된 의자, 지난번 프로젝트 때 쓰고 방치된 소품들. 사진을 찍어 당근마켓에 하나둘 올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관심 있어요’라는 알림이 뜬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오래된 방 안에서 숨 쉬지 못하던 물건들이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듯했다. 스튜디오는 조금씩 가벼워졌고, 내 마음도 덩달아 산뜻해졌다.

하루는 옆에서 “엄마, 이제 쉬세요. 저녁에 정리하면 돼요.” 하면서도, 내가 물건을 내놓을 때마다 슬쩍 관심을 보였다. 아마도 엄마가 자신들의 스튜디오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는 걸 느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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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정리하는 시간

돌이켜보면 오늘은 단순히 스튜디오를 정리한 하루가 아니었다.
십 분은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오십 분은 나를 정리한 날이었다.

글을 쓰고, 뉴스를 듣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며 멈추어 있던 생각들을 풀어냈다. 산만했던 마음이 조금씩 정리되면서, 내 안에서도 새로운 공간이 열리는 듯했다.

저녁 무렵, 지하에서 올라오는 계단이 유난히 가볍게 느껴졌다. 땀은 잔뜩 흘렸지만, 마음은 맑았다.

오늘 하루, 나는 아들의 스튜디오에서 또 다른 하루를 잘 보냈다.
“하루의 문에서 시작한 하루, 나만의 마루끝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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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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