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직전의 밤
29화. 떠나기 직전의 밤
여행.
온전히 내 곁에 있는 시간.
그는
4박 5일의 여행을 계획했고,
둘은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다.
장가계로.
그 이름만으로도
미화는
잠시 안심했다.
이동도, 일정도, 밤도
모두 함께일 거라는
확실한 약속처럼 느껴졌으니까.
---
테우리 오기로 한 시간은
새벽 세 시.
여행 전날 밤,
미화는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했다.
연락은
없었다.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길었다.
전화를 걸면
연결음만 길게 울렸고,
톡은
읽히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바쁜 걸까.
하루를 통째로?
미화의 마음은
서서히
원망으로 기울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사랑은
서운함으로 변했고,
서운함은
불안으로 번졌다.
---
밤이 깊어
새벽으로 넘어갈 즈음,
미화는
이미 잠을 포기한 상태였다.
시계는
두 시를 가리켰고,
그제야
휴대폰이 울렸다.
짧은 메시지.
“갈게.
준비 다 됐어?”
그 문장 하나에
미화의 감정은
한꺼번에 쏟아졌다.
안도와 분노,
반가움과 서러움이
뒤엉킨 채.
---
갈게라는 말은
왜 이렇게
가볍게 느껴질까.
어디에 있었는지,
왜 연락이 없었는지,
설명은 없었다.
늘 그랬듯
미화는
묻지 않았다.
여행을 앞두고
싸우고 싶지 않았고,
이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
짐은 이미
다 싸여 있었고,
마음만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미화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 여행에서만큼은
정말 내 곁에 있을까.
강가계의 풍경보다
그의 눈길이
자신에게 머무를지를
더 궁금해하는 자신을 보며
미화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
곧
차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가 문을 두드리면
미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을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도
이 여행만큼은
믿고 싶었다.
온전히 내 곁에 있는
시간이
존재한다고.
새벽 공기 속에서
미화는
그를 기다리며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번만은…
이번만은 괜찮겠지.
장가계, 첫날 — 신혼처럼
장가계.
중국.
비행기 문이 열리자
낯선 공기와 함께
이국의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미화는
그 순간을 오래 기억했다.
그가 자연스럽게
자기 가방을 하나 더 들어주고,
사람들 사이에서
미화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반 박자 앞서 걷던 그 장면을.
마치—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가
처음 신혼여행을 온 것처럼.
---
패키지여행 특유의
빠듯한 일정과
가이드의 빠른 중국어,
낯선 음식과
버스 안의 어색한 웃음들 속에서도
그와 미화는
이상하게 편안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도
미화를 아내처럼 챙겼다.
“미화야, 이거 미끄러워.”
“여기 앉아, 내가 서 있을게.”
자연스러운 손길,
당연하다는 듯한 배려.
미화는
그 순간마다
괜히 숨이 가빠졌다.
이런 모습이
일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
장가계의 산은
사진보다 훨씬 웅장했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봉우리들 사이로
안개가 천천히 흐르고,
하늘과 땅의 경계가
흐려지는 풍경 속에서
미화는
그의 팔에 살짝 몸을 기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내주었다.
그 침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미화는
눈물이 날 뻔했다.
---
점심 식사 자리에서도
그는
미화의 그릇을 먼저 살폈다.
매운 건 덜어주고,
익숙하지 않은 음식은
자기가 먼저 맛봤다.
“괜찮아. 먹어도 돼.”
그 한마디에
미화는
괜히 웃음이 났다.
사십 대 후반의 신혼—
설렘이 크다기보다
서로의 숨결을
조심히 다루는 느낌.
뜨겁기보다는
단단한 온기.
---
첫날 밤,
호텔 방에 들어섰을 때
미화는
창가에 서서
장가계의 밤을 바라보았다.
네온과 어둠,
익숙하지 않은 도시의 숨결.
그는
뒤에서 미화를 감싸 안았다.
“이 여행,
나한테는 되게 특별해.”
그 말에
미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특별하다는 말이
기쁘면서도
두려웠다.
---
그날 밤,
둘은
천천히 서로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욕망보다
안정이 먼저였고,
확인보다
체온이 앞섰다.
미화는
잠들기 전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그의 사람이다.
내일이
어떻게 변하든,
의심이
다시 고개를 들든—
장가계의 첫날은
분명
사랑처럼
완벽했다.
장가계, 첫날의 끝에서
건강하고 강한 그의 등을 바라보며
미화는
자꾸만 마음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여행지의 공기 때문인지,
그의 어깨에 스며든 여유 때문인지—
아니면
이렇게 온전히 곁에 있는 시간이
너무 오랜만이라서인지.
미화는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아주 가볍게,
정말 농담처럼
여행 전날의 일을 흘렸다.
“근데…
어제는 진짜 바빴나 봐.”
말끝을 흐리며 웃었지만
그 안에는
작은 시험이 숨어 있었다.
---
그는
잠깐 미화를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늘 그렇지 뭐.”
설명은
그뿐이었다.
미화는
더 묻지 않았다.
웃음으로 넘겼다.
이혼남이라는 사실을
서류로 확인한 적도 있었고,
굳이 지금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으니까.
의심의 덩어리를
조금만,
정말 조금만
풀어보고 싶었다.
---
그가 막내라는 것,
병든 노모를 모시고 산다는 것,
자식들이 있다는 것—
그 모든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간병인이
셋이나 교대로 드나들 만큼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다는 것까지.
그래서
더 이해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체계와
그 정도의 여유가 있는데도
하루를 통째로
연락 두절로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
호텔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그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을 때
미화는
다시 한 번 느꼈다.
이 사람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건강하고,
강하고,
웃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머릿속의 의문들은
잠시
뒤로 밀려났다.
---
그는
침대에 앉아
미화를 끌어당겼다.
“여행 와서
그런 생각 하지 마.”
그 말은
다정했지만
어딘가
닫혀 있었다.
미화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물기로 선택했다.
---
그러나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도
미화의 마음 한켠에는
이해되지 않음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사랑은
때로
확신보다
의문 위에서 더 오래
버텨진다는 걸
미화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의심을 몰아내지도,
끌어안지도 못한 채
그저
잠시 눕혀 두었다.
장가계의 첫날 밤은
여전히
신혼처럼 달콤했지만—
그 달콤함 아래에는
말해지지 않은 질문들이
숨을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