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하드보일드, 결론은 로맨스
2025년 10월 말, 정확하진 않지만 와인바를 창업한 지 1년이 되었다. 성공했냐고? 실패했냐고? 글쎄. 창업을 준비할 땐 우려와 걱정보다는 희망과 기대가 더 컸다. 부풀어 오른 마음에 가게의 콘셉트도, 운영 전략도 엉성하게 세운 채 영업을 시작했다. 매출은 들쭉날쭉하고, 할 일은 산더미다. 메뉴 개발, 세금 처리, 고객 관리, 홍보, 청소, 가게 수리... 만들자면 한도 끝도 없는 잡다한 업무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하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추억과 다양한 경험과 치열한 고민이 남았다. 그래서 창업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계속 버틸 수 있을까?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내가 계획한 목표들을 이룰 수 있을까? YES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갑자기 등 뒤가 서늘하다. 돌아보니 게으름과 불안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나는 초심을 잃은 걸까. 앞으로 더 열심히, 잘할 수 있을까. 고작 1년이 지났지만, 벌써 1년이 지나기도 했다. 버티려면, 더 나아지려면 뭐라도 계속해야 하는데, 나는 지금 뭐라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뭐를 하며 1년을 보낸 걸까.
PC에 저장되어 있는, 틈틈이 기록해 왔던 자영업 일기를 살펴보다가 작년 12월 초에 썼던 글을 열어보았다. 창업한 지 한 달이 되어갈 때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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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바를 오픈한 지 한 달이 되어간다. 흔히 말하는 오픈발이라는 게 있고, 그런 행복한 순간이 지속될 거라 믿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내 가게는 오프발마저 없다. 마수걸이를 해주러 온 지인들을 제외하면 일주일에 일반 손님 서 너 팀을 받는 게 전부다. 인테리어에 들어간 돈이며 월세며, 고정비며 나갈 돈은 산더미인데, 이거 정말 이러다 큰일 나겠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네이버 플레이스 등록을 마치고 SNS 광고며 인스타 광고도 시작했지만 언제 그 효과가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래도 동네장사이니 근처 아파트에 전단지를 돌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식 광고방식이지만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나. 다행히 가게 바로 앞에는 2500세대가 모여사는 대단지 아파트가 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 안녕하세요 신규업체 오픈 알리는 아파트 전단지 광고를 하려는데요.
수화기 너머로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업종이시죠?
- 와인바입니다.
- 네, 매주 월요일 오후 1시부터 관리사무실에 오셔서 방문 접수하시면 되고요. 전단지는 60장 정도 준비하시고 선착순 5명까지 받으니 참고하시고요.
- 네. 비용은 얼마일까요?
- 부가세 포함 77000원입니다.
- 네, 알겠습니다. 광고기간은 며칠인가요?
- 접수일부터 일주일입니다. 아, 그리고 사업자등록증이랑 신분증 가져오셔야 해요.
- 네, 감사합니다.
며칠 뒤 월요일. 오후 1시가 되기 십분 전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방문했다. 문 앞에서 점심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는데 다행히 직원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업무를 재개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카운터에 앉아있는 여직원 한 명과 눈을 맞춘다.
용건을 말하자 직원은 무심히 도장 하나를 건넨다.
- 전단지 가져오셨죠? 한 장씩 이 도장 찍으시고요,
-신분증이랑 사업자등록증 주시고... 아, 여기 계좌에 77000원 먼저 입금하셔야 해요.
직원은 검지로 카운터 테이블 한편에 붙어있는 계좌번호 안내문을 가리켰다.
건네받은 도장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문서통제. 2024년 12월 9일" : 오늘이 12월 2일이니 일주일 동안 전단광고를 아파트 각동 건물 입구에 게시할 수 있음을 허락한다.
안내에 따라 접수를 마치자 그녀는 입구 출입카드를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 신분증 맡기셨다가 오늘 여섯 시 전에 출입카드 돌려주시고 신분증 받아 가세요.
- 오늘 제가 일이 있어 저녁 지나서야 전단을 붙일 수 있는데 내일까지 마치고 카드는 내일 드려도 될까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 안 돼요. 그럼 일단 오늘 반납하셨다가 내일 다시 카드 빌려가세요.
- 네 알겠습니다.
이런저런 일정을 마치고 전단을 붙이기 시작한 시각은 저녁 7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일단 카드를 반납하려 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내일 그냥 돌려줘야지, 약간의 배짱을 부려보기로 했다.
겨울의 해는 일찍 저물었고 찬 바람은 유난히 거칠다. 나는 전단지가 든 봉투를 들고 101동 1, 2호 라인 건물 앞에서 섰다. 일단 긴 숨을 들이마셔 본다. 아파트는 2500세대가 사는 대단지. 2개 단지로 나뉜 구역, 총 31개 동에 대부분 1, 2호, 3, 4호 라인까지 있었으니 대략 60채의 건물이 있는 셈이다. 전단지 60장 준비하라는 이유가 있었구나.
잠시 생각해 본다. 각 동의 건물은 동호수순으로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는 게 아니고 구불구불 단지 내 크고 작은 길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몇 동 몇 호에 전단을 붙이고 나왔는지 헛갈릴 거다. 다행히 주머니에 볼펜 하나가 있어 전단지 붙인 동호수를 봉투에 적기로 했다. 101동 1,2호 라인 · 입구 게시판에 첫 전단지를 붙이고 나왔다. 그다음엔 101동 3,4호 라인, 102동, 103동, 그 옆에 107동, 그 옆에 109동. 발길 닿는 대로 전단을 붙이고 동호수를 봉투에 적어 나갔다.
초겨울 세찬 바람 때문인지 단지 내 인적은 드물었다. 전단을 붙이고 종종 입구에서 마주친 주민들은 OPEN이라고 크게 적힌 전단지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어깨를 움츠린 채 엘리베이터로 돌진한다.
광고 효과가 있으려나.. 몇 명이나 전단지에 눈길을 줄까... 광고게시판을 보기나 할까... 나도 아파트에 살지만 나는 출입구 앞에 있는 광고게시판을 유심히 본 적이 있던가...
110동 3-4호 라인 광고를 붙이고 나오는데 주민으로 보이는 50대 남자가 출입문에 들어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광고게시판을 유심히 바라본다. 있구나, 게시판을 보는 사람이 있구나. 웃음을 지어본다. 일희일비가 따로 없군.
전단지를 게시판에 붙이는 일은 은근히 번거롭다. 왼손에는 전단지가 든 봉투, 오른손엔 출입카드. 게시판 클립에 전단지를 끼워 넣을 땐 한 손으로 부족하니 봉투에서 전단지 한 장 꺼내고 봉투를 잠시 입에 물고 왼손으로 클립 주둥이를 벌리고 오른손으로는 전단지를 끼워 넣는다. 그리고 이 동작들을 계속 반복.
꾀를 내본다. 봉투를 동그랗게 오므려 코트를 여민 두 번째 단추와 세 번째 단추 사이에 쑤셔 넣는다. 이제 왼손이 자유로워졌다. 봉투 속에서 전단지 한 장을 꺼내 게시판 클립에 끼우기만 하면 된다. 요령이 생기니 작업 속도도 빨라진다. 이런 사소한 요령도 시행착오 없이 바로 생기진 않는다. 문득 슬링백을 가슴에 매고 다니며 전단지를 백에서 한 장씩 꺼내 전봇대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을 본 기억이 난다. 슬링백을 매는 이유가 있었구나.
제2단지 건물을 돌기 시작했다. 약간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한다. 다른 광고 전단지들이 이미 게시판 가득 끼워져 있어 게시판에 내 것을 끼울 공간이 없는 거다. 그냥 다른 전단지 위에 붙이자니 상도덕에 어긋나는 것 같다. 유심히 전단지 내용을 살피니 행사를 알리는 전단지에 찍힌 도장 문구 하나가 눈에 띈다: 문서통제 2024.11.24. 광고 게시 기한이 일주일 정도 지났다는 뜻이다. 마침 행사일자도 11월 28일로 적혀 있다. 이미 행사가 끝났으니 광고의 의미가 퇴색된 전단지였다. 다행이다, 나는 그 행사 전단지 위에 내 것을 붙였다.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니 기쁘다. 잘하면 게시 기한이 지나도 내 가게 전단지가 살아남아 게시판에 붙어있을 수도 있겠다. 전단지가 노출될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50개 동을 돌았다. 몇 개 남지 않았구나. 힘을 내보자. 이번엔 213동 건물이다. 전단을 붙이고 나오는데 입구 앞에 즐비하게 놓인 우체통에 꽂혀있는 또 다른 전단지를 발견했다. 아, 우체통에 끼워 넣는 전단지 광고도 있구나. 이것도 해봐야지. 근데 이 광고는 비용이 또 얼마나 들까.. 2500세대이니 2500개의 우체통에 전단지를 한 장씩 끼워 넣어야 하는 건가? 괜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지막 건물 게시판에 전단지를 붙이고 나서 시계를 보니 딱 2시간 30분이 지나 있었다. 갑자기 극심한 요의가 느껴졌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공동 화장실이 없다. 나는 서둘러 가게로 향했다. 가게에 도착해 시원하게 소변을 보고 나니 다리의 뻐근함이 느껴졌고 갈증이 찾아왔다. 물 한 컵을 마시고 나니 약간의 노곤함이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잠시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린다.
이 따위 전단지 광고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그래도 효과는 좀 있지 않을까. 전단지를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2500세대나 되는 대단지 아파트 전역에 전단을 붙였으니 100명은 오지 않을까. 오프라인 광고보다 온라인 광고를 더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대박 날 수 있을까. 아니, 창업자 100 명 중 90% 이상이 3년 안에 폐업한다던데 나는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자질구레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동시에 머릿속을 한바탕 휘젓고 지나가니 오히려 아무 생각도 남아 있지 않다. 광고 효과는 아무리 예상해 봐야 모를 일이며 어찌 되든 뭐라도 해야 하는 거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게 자영업자의 일상이니까. 문득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었다. 집에 가려면 지하철을 타야 하는데, 여기 영등포에서 용인까지 가려면, 막차를 타야 하는데 막차는 11시 40분에 있었는데, 그러니까 지하철이 끊긴 거구나. 가게 소파에서 자야 하니 담요를 꺼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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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로부터 11개월이 나에게로 달려온 지금, 예전 일기를 다시 읽어보니 나름 많은 일이 있었다. 가게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고, 와인 시음회를 했고, 단골이 생겼고, 가게 벽면엔 내가 그린 그림들이 훨씬 많아졌고, 여전히 매출은 들쭉날쭉하다. 뭐라도 해야 하는 건 여전하다. 그래도 손님과의 기분 좋은 만남이 기다려지고, 홀로 가게 한구석에 덩그러니 앉아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순간은 슬프면서 좋다.
문득 이런 말이 생각났다: 인생은 하드보일드, 결론은 로맨스.
후설: 내 기억으로는 그때 '전단지 광고'를 보고 가게를 찾아온 손님은 4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