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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 이벤트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초자연적 현상을 믿는가?

by 마이크 타이프

늦여름 비가 쏟아지는 저녁이다. 게릴라성 폭우인지 굵은 빗방울이 쉴 새 없이 와인바 창문을 투둑투둑 때린다.


이렇게 세찬 비가 내리는 날은 기분이 좋다. 빗소리와 미드 템포의 재즈 음악을 블렌딩한다. 스피커의 중저음 사운드를 좀 더 진하게, 그렇게 홀로 음악비를 만끽하는 낭만이 있으니까.


아니, 이렇게 세찬 비가 내리는 날은 기분이 좋지 않다. 음악비의 낭만을 영업시간 끝날 때까지 '나홀로' 즐겨야 할지 모르니. 그렇다, 이런 폭우를 뚫고 이런 후미진 곳, 그것도 2층에 있는 와인바에 손님이 찾아올 확률은 낮다. 창밖으로 우산을 부여잡고 서둘러 귀가하는 사람들을 보며 입맛을 다신다. 다들 우산을 쓰고 앞만 보며 걸어가고 있으니 2층 와인바의 네온사인이 보일 리 없다.


잠시 자리에 앉는다. 햇살지기라 이름 붙인 창가 쪽 자리다. 맑은 날엔 햇살을 듬뿍 받을 수 있고, 비오는 날엔 빗줄기를 실컷 감상할 수 있다. 창밖에 보이는 네온사인의 파장이 빗물 속에서 아릿하게 퍼진다. 가게 문을 닫고 다른 분위기 좋은 위스키 바를 찾아가고 싶다. 차라리 내가 손님이 되어 술 한잔 하며 비 내리는 경치를 바라보면 한결 마음이 편하겠다.


한숨 한번 크게 쉬니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어차피 손님은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느니 차라리 뭐라도 해보자. 비오는 날, 게릴라 이벤트 같은 거라도 해보자.'


곧바로 랩탑 컴퓨터를 켰다.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PPT 슬라이드에 커다란 글자로 이렇게 썼다.

"게릴라 이벤트: 비가 옵니다. 와인 무제한, 한 잔 값만 내시고 마음껏 드세요 - 소진 시까지"


이런 취지의 글을 슬라이드의 텍스트 상자에 때려 넣었다. 그리고 창가 바로 옆에 설치해 놓은 32인치 모니터를 랩탑에 연결해 PPT 슬라이드를 모니터에 띄운다. 모니터 화면을 창문에 바짝 갖다 댄다. 이렇게 하면 누군가는 나의 메시지를 볼 수도 있다. 못 보면 어쩔 수 없고, 여러 생각 말고 일단 이런 게릴라 이벤트라도 해보자.


설치를 끝내고 밖에 나가 2층 창문을 바라본다. 다행히 텍스트는 잘 보인다. 우연히 2층 창가를 바라본다면 게릴라 이벤트 메시지를 볼 수도 있겠다. 내친김에 A4용지 네 장에 이벤트 공지글을 인쇄, 출력한다. 1층 출입문에 붙여볼 참이다. 오며 가며 잠깐 눈길이라도 주지 않을까.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잠시 나갔다 왔는데도 바지가 비에 흠뻑 젖었다. 비를 털고 다시 창문을 바라본다. 창문에 반사되어 비치는 PPT 슬라이드의 텍스트를 다시 읽어 보며 피식 웃는다. 별 걸 다해 본다. 그렇지? 그런데 진짜 누군가 와서 땡잡았다,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고 가버리면 내가 너무 손해 아닐까? 별 생각을 다한다. 그럼 어떠랴, 화끈하게 가게 홍보하는 셈 치면 된다.


딸랑, 문에 달아놓은 풍경이 울린다. 두 명의 손님이 조심스레 들어온다. 나는 속으로 짐짓 놀란다. 게릴라 이벤트 공지한 지 10분이 채 안 되었는데 벌써 이렇게 효과가 있다니? 손님을 자리에 안내하고 물 한잔씩을 서빙하면서 묻는다. 이벤트 공지 보고 오셨죠? 손님의 답은 의외였다. 아니요? 오늘 무슨 이벤트 하시나요?

나는 '폭우 속 게릴라 이벤트'를 설명해 주자 그녀들은 반색하며 즐거워한다. 정말요? 그냥 평소 한 번 들러보고 싶다가 그냥 올라와본 건데, 운이 좋네요.


손님이 테이블 한 자리를 채워주자 가게의 분위기가 확 바뀐다. 활기가 차오른다. 음식 장사나 카페나 바를 운영하는 분들은 공감할 것이다. 손님이 몰고 오는 기분 좋은, 그런 '기운'이란 게 있다. 단지 매출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공간에 아무도 오지 않으면, 마치 내 생일잔치 초대에 아무도 오지 않는 것 같은 쓸쓸함이 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초청된 친구가 찾아온 것 같은, 아무튼 그런 기분좋음이 있다.


딸랑, 문에 달아놓은 풍경이 (또 한 번) 울린다. 두 명의 손님이 또 들어온다. 인사하며 역시 묻는다. 이벤트 공지 보고 오셨나요? 아니요? 오늘 무슨 이벤트 하시나요? 소식을 전하니 역시나 기뻐한다.


그렇게 폭우 속 게릴라 이벤트가 열린 바에는 세 팀의 손님들이 모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벤트 소식을 접하고 찾아온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폭우 속에 나름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준 게 고마웠고, 나름 크게 써붙인 이벤트 공지를 전혀 못 봤다는 것도 놀라웠다. 큼직한 광고판도 관심 있게 살펴보지 못하면 인지하지 못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가 이렇게 어렵다.


신(God)을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은 믿는다. 폭우를 탓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 손님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뭐라도 해보려는 '시도'에 왠지 모르게 끌려 손님들이 찾아와 주었다고 믿는다. 이벤트 공지를 보았든, 못 보고 그냥 왔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뭐라도 하니까 뭐라도 된다는, 초자연적 현상이 있을 거라 믿는다.


와인 한 잔 값에 실컷 마시고 가라는 이벤트를 괜히 한 건 아닐까? 어차피 올 손님들이었는데 고작 와인 한 잔 값만 받고 와인을 무제한 제공하다니! 이것도 틀린 생각이다. 가게 사장이 밑질 것 같다는 생각에 손님들은 알아서 이런저런 안주도 시키고 다른 음료도 시켜주며 매상을 올려준다. 싼 값에 와인을 실컷 마실 수 있지만 오늘 봉 잡았네 하며 벌컥벌컥 마시는 손님들도 없다. 적당히 기분 좋게 이벤트를 즐기고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다. 무엇보다 가게의 공기를 바꿔준다. 공기청정기처럼 '쓸쓸한' 기운을 '활기찬' 낭만으로 바꿔준다.


마감시간이 되니 폭우가 그쳤다. 언제 또 폭우가 찾아올까. 그때 다시 '게릴라 이벤트'를 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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