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홍이가 왔다 1

화요모임이 시작되었다

by 마이크 타이프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가 처음 내가 운영하는 와인바에 찾아왔을 때를 상기해 보면 아마도 늦봄 또는 초여름 정도였던 것 같다. 야구모자를 뒤집어쓰고 아이보리 반팔티에 헐렁한 추리닝. 발가락이 훤히 보이는 슬리퍼가 기억나는 걸 보면 그즈음이 맞을 거다.


아무리 봐도 20대로 보이는 , 그리고 아무리 봐도 키가 170센티는 넘어 보이는 휜칠한 키의 그녀는 자리를 잡지도 않은 채 수줍은 듯 와인바 공간을 찬찬히 살펴봤다. 나는 "편한 곳 아무 데나 앉으시라"고 말하면서도 어느 테이블 위에 놓인 컵에 물을 따랐다. 그녀는 하우스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나는 하우스와인 한잔과 약간의 치즈 안주를 내어주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대화를 시작했다. 그녀가 들어오기 전, 나는 손님 없는 빈 공간에 덩그러니 서있었으니 그녀의 등장에 내심 반가움이 넘쳤나 보다. "어떻게 이런 외진 곳을 다 찾아오셨냐"는, 나의 질문도 환영인사도 아닌 물음에 그녀는 "몇 달 전부터 여기 와보고 싶었어요, 뭔가 신비한 분위기일 것 같아서"라는 기분 좋은 답변을 건넸다. 그날 어떤 대화를 더 나누었는지 더 이상은 기억나진 않는다. 대화내용을 까먹진 않았다. 그날의 대화와 그날 이후의 대화들이 기억 속에 뒤죽박죽 뒤엉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날로부터 6개월, 우리가 이제까지 몇 번을 만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가게에 온 날 이후 그녀는 삼일에 한번, 이틀에 한 번씩은 와인바에 들르곤 했다. 카페에서 마감조 알바를 하고 있다는 그녀는 알바가 끝나는 밤 11시가 되면 와인바로 뛰어와(정말 뛴 적도 있다고 한다) 와인 한 잔 하며 잠시 시간을 보내다 귀가했다. (참고로 와인바는 12시에 영업을 마감한다.) 때로는 와인을 마시며 가게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을 골라 읽기도 하고, 종이 한 장을 가져와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와인 한 잔 놓고 자리에 앉아 뭔가를 끄적대는 그녀를 보며 스케치를 해주었던 적도 있다. 어떤 측면에서 그녀는 완벽한 오브제였다.(엄청난 미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예쁜 쪽에 속하는 편이기는 하다.) 내가 와인바를 창업하고 공간을 꾸미면서 그려왔던 어떤 이상향은 '고독한 밤, 와인 한 잔을 따라놓고 책을 보거나 뭔가를 끄적거리는 공간. 그 공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그런 공간, ' 뭐 이런 - 유치하지만 낭만이 깃든 -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상향을 그녀가 명확하게 구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스럽고 고마운 오브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언제 통성명을 했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이름은 '홍이'였다.(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 성은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별명이 '홍이장군'이라고 귀띔해주기도 했다. 홍이장군은 홍삼 브랜드 마스코트의 이름으로 알고 있다.


통성명까지 하고 나이도 서로 밝혔지만 아무튼 와인바를 찾아오는 단골 '손님'이었기에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나보다 스무 살은 더 어리니 반말을 해도 될 법 하지만 - 나도 모르게 반말을 한 적도 있는 것 같다 - 존댓말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사적인 대화를 종종 나누기도 했지만 프라이버시를 침범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4명이 되었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틀에 한 번꼴로 오는 홍이와 삼일에 한 번 꼴로 오는 가게 근처에 사는 나의 친구와 가게에서 알게 된 - 이틀에 한 번꼴로 오는 - 또 한 명의 단골이 가게에서 조우해 대화를 서로 건네며 연락처도 주고받는, 나름의 '친구'가 되었다.


누가 누구에게 '나 지금 와인바에 와 있으니 시간 되면 오라'는 카톡메시지를 건네지 않았는데도 우연찮게 함께 모이게 되는 날도 있다. 특히 화요일이 그런 날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매주 화요일은 암묵적으로 우리 4명이 모이는 날이 되었다. 물론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에 나는 그 누구에게도 '화요일인데 안 오냐'는 메시지를 보낸 적이 없다. 하지만 가끔 선을 넘은 적도 있다. 4명이 모인 화요일엔 와인바의 영업시간이 연장되어 새벽 1시, 2시가 되어서야 마감된 적도 있으니. 네 명의 나이 차이는 상당했다. 한 명은 20대, 한 명은 30대, 두 명은 40대. 홍이는 이름 때문인지 우리 네 명의 '홍일점'이 되었다.


우리 네 명은 매주 화요일에 모여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30대 친구는 스릴러 소설 '홍학의 자리'를 꼭 읽어보라며 다음 주엔 아예 독서모임을 갖자고 제안했다. 경제학과 출신인 40대 친구는 베블린의 '유한 계급론'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홍이는 잠자코 들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자신의 고민을 종종 털어놓기도 했으며, 나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 조르기도 했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와인 한 두 병은 쉽게 동났고, 와인 값은 대부분 40대와 30대가 냈다. 나는 서비스 안주를 종종 내어 주었고, 홍이는 맨날 얻어먹는 건 싫다며 오늘은 자기가 쏜다고 우기기도 하고, 자기가 일하는 카페에서 파는 - 마감 후 남은 - 빵을 이것저것 싸가지고 와서는 자랑스럽게 테이블 위에 풀어놓기도 했다.

(다음 편에 계속)









keyword
이전 26화게릴라 이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