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의 중국행
와인바의 충성 고객인 20대의 홍이에게는 그 또래의, 그 또래만이 가질 수 있는 - 유치하기도 하고 조금은 또 멋있는 - 20대의 라이프 코드가 있었다. 그 코드는 바로 '방황'. 40대가 된 나도 한때 향유했던 20대의 패션, 20대의 라이프스타일, 그놈의 '방황'. 그녀는 종종 나에게 자신의 방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대학을 갓 졸업한 홍이는 몇 번의 당연한 실패를 20대의 특별한 실패로 해석하곤 했다. 몇 번의 일자리 구하기가 실패했고, 입학을 원했던 대학원 입시에도 떨어져 마음이 괴롭다고 털어놨다. 40대인 내가 보기엔 별 것 아닌 고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누구도 당사자의 고뇌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묵묵히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곤 했다.
손님이 특히 없는 화요일이 되면 와인바는 홍이를 포함해 세 명의 단골이 합류하는 시공간이 되었다. 한 여인을 잊지 못해 번번이 연애에 실패하는 30대 남자, 별다른 노력 없이 획득한 비혼의 자격을 유지하고 있는 또 다른 단골, 40대 남자(나의 고교 동창)는 홍일점인 홍이를 중심(?)으로 화요일에 모이는 이른바 '화요 모임'의 멤버가 되었다.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았지만 '오늘 화요일인데 안 오냐'는 카톡 메시지를 남기지도 않았다. 그래도 자연스레 화요일이면 와인바를 찾아와 함께 모여 와인잔 너머 대화를 나눈다.
어느 화요일 밤, 우리의 주제는 '홍이의 미래와 방황'으로 수렴되었다. 홍이는 자신의 방황을 해결할 방법으로 영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 해외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20대 소녀(?)의 꿈을 영국에서 펼쳐보겠다던 홍이는 이미 나름 인지도가 있는 영국의 킹스칼리지 입학시험 절차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다만, 문제는 영어 에세이 시험이었는데 몇 번의 시험에도 0.5점 정도 간발의 차이로 기준에 못 미치니 답답하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온화한 성격의 40대는 무한한 위로와 응원을 건넸고, 냉소적 캐릭터의 끝판왕인 30대는 '정신 차리라'는 직언을 날렸다. 영국 유학에 한 두 푼이 드는 것도 아닌데 학비와 생활비로 돈 낭비하지 말라, 뚜렷한 목적 없이 영국으로 건너가겠다는 결심은 결국 불안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비겁함에 불과하다! 중간자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나는 평소의 직설적인 언행을 자제하면서 묵묵히 경청해 주는 역할을 자처했다.
"그래서 만약에 영국 유학에 실패하면 어떡할 건데?" 냉소적 30대가 쏘아붙이듯 홍이에게 물었다. 홍이도 나름 플랜 B가 있었다. 중국어에 능통한 그녀는 에세이 점수가 안 나와 영국 유학에 실패하면 일단 중국 상해에 가서 일자리를 구해보겠다고 했다. 무역 관련 학과를 나온 터라 중국에 소재한 한국의 무역회사에서 통역 업무를 해볼 참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어설픈 영국 유학생활보다 돈 벌면서 차근차근 20대의 방황을 재정비해보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냉소적 30대는 "그래, 그거네. 영국 유학 그냥 포기해라!"라며 중국행을 종용했다.
...
얼마 후 9월 중순, 홍이는 진짜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끝내 마의 0.5점을 극복하지 못했는지, 마음을 다잡았는지 중국 소재 무역회사에 취업했다. 일이 그다지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견뎌내고 있다는 소식과 중국에서는 카톡 메시지 연락이 힘들다는 소식을 동시에 전해왔다.
사실 홍이의 중국행을 모르던 바는 아니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어느 화요일 모임에서 홍이는 "그렇게 되었다"라고 우리에게 통보했다. 통보를 받은 우리는 왠지 모를 - 아니, 모를 리 없는 - 아쉬움에 '홍이 송별회'를 갖기로 했다.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우리의 마지막 모임이었다. 송별회라 해도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여느 때와 같이 와인을 마셨고, 대실 해밋의 하드보일드 소설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전 인종차별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른 영국 그룹 오아시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공간에 자꾸 차오르는 짖꿎은 아쉬움이 쌓이지 않도록 우리는 각자 노력했다. 연인과의 이별도 아니고, 요즘은 인스타그램이며, 카톡, 다양한 SNS로 언제든지 근황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비행기로 두세 시간이면 왕래할 수 있기에 '이별'이란 말은 어쩌면 너무 끈적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아쉬움에 우리는 평소보다 많은 양의 와인을 마셨고 때때로 어수선한 정적이 흐르기도 했다. 와인바가 폐업하지 않는 한 우리의 재회는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희망을 주고받았고, 그럼에도 언제 다시 모일 수 있을지 모르기에 불안한 눈빛을 서로 목도하기도 했다.
송별회는 예상외로 길어졌다. 새벽 2시가 되자 우리는 '2시 반에는 가자'라고 약속했고, 2시 반이 되자 세 시에는 가자라며 약속을 번복했고, 세시가 되자 우리는 아예 새로운 작별 시각을 정하지도 않았다. 홍이는 자신이 가져온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넷의 사진을 몇 차례 찍었고, 각자에게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좀 유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홍이가 건넨 폴라로이드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송별회는 새벽 4시에 끝났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의 체력 때문이었다. 끈적한 아쉬움도 밀려오는 졸음과 취기를 이겨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이제 진짜 가자"라는 말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난장판이 된 테이블을 다 함께 치우고 가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내가 반대했다. 벌레가 꼬일지 몰라 남은 음식물만 모아 버리고 나머지는 다음 날 가게 오픈 전에 치우기로 했다.
가게 문 앞에서 우리는 별말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작별 인사는 짧을수록 좋다. 30대는 가게 앞에서 택시를 잡아 탔고, 40대는 집이 가까우니 걸어간다고 했다. 가게 바로 윗동네에 사는 홍이는 내가 데려다 주기로 했다.
우리 둘은 잠시 걸었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홍이의 집 근처에서 우리는 짧고 정갈한 포옹을 나누었고, 나는 마침 다가오는 택시를 잡았다. 평소 같으면 따릉이 자전거로 갔을 텐데, 도저히 그럴 힘이 없었다. 자전거도 음주운전은 안된다는 따릉이 앱의 공지사항이 생각났다.
가게에서 별로 멀지 않은 집에 도착한 나는 샤워를 하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