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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가 왔다 3

두 개의 점

by 마이크 타이프

와인바 단골 모임인 '화요모임'은 홍일점, 홍이가 중국으로 간 이후에도 그럭저럭(?) 이어졌다. 나는 나머지 멤버들에게 '홍이가 중국 갔어도 화요일엔 모여야죠?'라는 종용의 메시지는 보내지 않았고, 그럼에도 나머지 단골들은 화요일이면 가게문을 열고 들어왔다. 홍일점이 빠지니 왠지 김이 샌다는 냉소적 30대남의 직설을 나머지 두 명의 40대 남자는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와인바에 들르던 홍이가 몇 주일 동안 보이지 않으니 때때로 담백한 '보고 싶음'이 찾아온다. 그리움이라 하기엔 너무 끈적하고 궁금함이라 부르자니 왠지 성의가 없는, 그런 미세한 파동의 보고 싶음.


석 연휴를 앞둔 목요일 밤엔 특히 그랬다. 딱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건 가수 장범준의 노래, <잠이 오질 않네요> 때문이었다. 따릉이를 타고 오픈 준비를 위해 가게로 향하던 중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유튜브 뮤직 알고리즘의 작전이었을까. 그의 노래 가사 일부를 잠시 소개한다.


당신은 날 설레게 만들어

조용한 내 마음 자꾸만 춤추게 해

얼마나 얼마나 날 떨리게 하는지

당신이 이 밤을 항상 잠 못 들게 해


매일 같은 밤 너를 생각하면서 유치한 노랠 들으며 심장이 춤을 추면서

오오 난 너를 기다리면서 유치한 노랠 부르며 심장이 춤을 추면서 워

나를 떨리게 하나요 그대 왜 나를 설레게 하나요 자꾸만

오늘도 잠 못 이루는 이 밤 아름다운 그대


나를 아프게 하나요 웃는 그대 왜 자꾸 설레게 하나요 하염없이

오늘 밤 잠이 오질 않네요 보고 싶은 그대여


이 노래가 홍이를 떠올리게 했는지, 그냥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나와 홍이의 관계를 이 노래가 직유한다고 말할 순 없다. '당신은 날 설레게 만들'지도, '당신이 이 밤을 항상 잠 못 들게' 하지도 않으며 '매일 같은 밤 너를 생각하'지도 않기에 '심장이 춤을 추'지도 않는다. 심장이 춤을 춘다면 그건 아마도 - 누군가의 유머처럼 - 부정맥이 생긴 거겠지. 하지만 홍이가 종종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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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앞둔 목요일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없다. 서로 상관관계는 없다. 다만, 연휴를 앞두고 '손님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과 긴 연휴를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고향으로 내려갔거나 해외여행을 떠났을 텐데 '손님이 오겠냐'는 불안한 절망이 공존한다.


다행이랄까, 별로 놀랄 것도 없는 40대 단골남의 등장. 나는 그저 웃었고 그는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오늘은 목요일인데 30대 그 친구도 오려나?" 글쎄 모르지. 연락해 볼까라는 친구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의 원칙 몰라? 와인바 왔다고 상대방에게 오라 말라 연락하지 않는다.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몰라?


그 대신 나는 '홍이와 장범준'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자전거 타고 가게 오면서 노래를 듣는데 장범준의 <잠이 오질 않네요>가 나오더라. 그런데 왠지 갑자기 홍이가 생각나더군."


친구는 "나도 가끔은 홍이가 생각나"라며 하나의 흥미로운 어젠다를 던졌다. "홍이와 함께 했던 우리 화요모임 - 그것도 술 모임 - 이 그토록 즐겁고 건전한 모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다양한 가설을 제시했다:

1) 남자 셋만 모였다면 그렇게 재밌을 리 있었을까, 제법 예쁜 20대 여인의 존재가 뿜어내는 야릇한 아우라 - 우리는 이를 '에로스'로 규정했다 - 가 우리를 인도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전한 모임이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옛 여인을 잊지 못한 30대 - 그래서 홍이에게 이성적 관심은 별로 없는 - 와 20대를 넘보기엔 자격 미달인 40대 비혼남, 그리고 그럴 자격 자체가 박탈된 유부남이었기에 가능했다.

3) 멤버들이 그래도 반듯한 예의를 갖춘 지성인이었으며, 가게 사장의 '그 어떠한 선도 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매너와 격을 이끌어내는 '와인'의 힘.


어떤 가설이 맞는지 검증할 수는 없었고, 오히려 새로운 질문이 친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무튼 우리가 또 그런 '화요모임'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려울 거야. 우리의 화요모임은 만든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레 만들어진 거니까. 우리가 부러 구축한 게 아니라 찾아온 거니까. 우리의 화요모임은 생각보다 복합적인 변수가 화학적으로 결합된 모임이었으니까. 만약 홍이가 성질 더러운 추녀였다면, 우리가 모두 20대였다면, 홍이가 30대남의 이상형이었다면, 40대 비혼남이 20대 여인을 넘볼 만큼 좀 더 과감하고 건방진 사람이었다면, 또 다른 40대남이 유부남이 아니었다면, 홍이가 연애와 사랑을 좀 더 갈망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 화요모임은 자멸했거나 해체되어야 했을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홍이, 언젠가 한 번쯤 우리 가게 오겠지?


평소 사유의 깊이가 남다른 친구가 말했다. "그럼, 올 거야. '두 개의 점'이란 거 알아?" 몰라, 그게 뭔데? "'두 개의 점이 서로 각자 움직이면 만나기 어렵지. 하지만 한 개의 점이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나머지 한 점이 언젠가 그 점을 찾아온다."


나는 그럴듯한 그의 궤변에 피식 웃음을 던졌다. 그래, 손님이 너무 없어 와인바가 망하지 않는 이상, 여기에 머무는 한, 나머지 한 점 - 우리의 홍일점 - 홍이는 다시 올 거야.


영양가는 없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참 주고받고 있는데 일련의 손님들이 시끌벅적 대화를 나누며 가게문을 연다. 우리의 우려와 바람을 엿들었을까, 손님들이 왔다! 어서 오세요. 그리고 얼마 후 "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어 와 봤다"는 혼술 손님이 들어왔고, 예전 시음회에 참석했던 얼굴이 익숙한 손님들도 가게를 찾았다. 나는 손님맞이에 바빠졌고, 친구는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홀로 와인잔에 와인을 따랐다. 오랜만에 가게는 시끌벅적해졌고, 나는 오랜만에 찾아온 기분 좋은 긴장과 피로감을 애써 감추며 서빙에 집중했다.


바쁘게 와인과 안주를 내어가며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생각했다. 추석 연휴를 앞둔 목요일이라 그런가, 손님이 많다! 물론 그 상관관계는 알 수 없다. 뭐 좀 도와줄까 일어나는 친구를 다시 앉혔다. 아니야, 만석의 기쁨과 슬픔은 나만 누릴 테다.


친구는 알았다며 다시 앉아 와인잔을 비우더니 문득 출입문 쪽을 바라보고는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는다. 그의 시선을 따라갔더니 문 앞에 낯익은 - 20대로 보이는 키가 큰 - 여인이 빼꼼히 와인바 내부를 바라보며 싱긋 웃고 서 있다. 홍이였다.




후설: 홍이는 중국도 추절 연휴에 돌입했다며,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잠시 귀국했다고 한다. 그녀는 우리를 놀래주기 위해 미리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프라이즈랄까. 혹시라도 연휴 앞두고 가게문을 닫았으면 어쩌려고. 화요일도 아닌데 화요모임 멤버가 아무도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아쉽게도 우리의 또 다른 멤버, 냉소적 30대남은 그날 와인바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따로 연락을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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