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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Sep 04. 2018

한-일 문학 교류, 일방통행 아닐까..

일본소설 <7월 24일 거리> 서평을 곁들임

십 수년 만에 일본 연애소설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 맞은편 교수 연구실 문 밖, 복도 한편에 진열하듯 쌓여 버려지길 기다리는 책들 위에 소설로 보이는 책이 놓여 있었다. 두께가 얇다는 이유만으로 슬쩍 집어와 책장을 넘겨본다. <7월 24일 거리>, 요시다 슈이치라는 작가가 썼단다. 대학 시절,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요즘은 원제 <노르웨이의 숲>으로 더 많이 불리는 것 같다)와 무라카미 류 작가의 엇비슷한 소설들을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묘하게도 <상실의 시대>를 읽었던 십 수년 전 어느 날에도 세찬 비가 내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늘의 지금도 폭우에 가까운 비가 쏟아지고 있다.


제목의 뜻이 궁금했다. 일본에 7월 24일 거리가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 있는 거리 이름이란다. 소설 속 여주인공 혼다 사유리가 자신이 사는 일본의 평범한 도시와 거리를 포르투갈 리스본과 연계하여 연상하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여주인공 혼다 사유리, 그녀가 흠모했던 고등학교 시절 육상부 선배 사토시, 사토시의 옛사랑이자 사유리의 직장 상사의 아내 아키코, 그리고 기타 등등의 인물들. 사유리는 자신이 사토시에게 그저 '아키코의 대용물'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치고 사토시와의 사랑을 시작해 보기 위해 용기를 낸다는...뭐, 그런 얘기다.


나는 열차에 올라타면서 그렇게 말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내내 움츠리고 있는 것보다, 실수를 저지르고 우는 한이 있어도 움직여보려 한다. (p.188)


200 페이지가 안 되는 소설이라 한 시간만에 금방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금방 읽기 위해 대충 읽은 부분들도 많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20대 시절 <상실의 시대>를 읽고 느꼈던, 어떤 격한 청춘의 감성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사유리와 같은 청춘이 아닌, 같은 여성이 아닌, 감성이 무뎌진 독자의 부족함에서 오는 독후의 감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생각에 걸린 것은 소설 자체의 내용이 아니라, 이 정도(?) 가벼운 내용의 한국어판 일본소설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작가와 소설의 퀄리티를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이한정 교수의 학술논문 <1945년 이후 일본의 한국문학 번역 현황 개관>에 따르면, 1945년부터 2016년까지 일본에서 번역되어 출판된 일본어판 한국문학의 간행종수는 496종이다. 그런데 2012년의 어느 칼럼을 보니, "한국에서 계약 출판되는 일본 문예물은 900여종...일본에서 계약 출간되는 한국 문예물은 20여 종에 불과"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Book DB 칼럼, "일본에서 한국문학을 출판한다는 것 1탄", 2012.02.07) 지금은 일본어로 번역되는 한국 문예물 종수가 크게 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수가 훨씬 많을 것이라는 직관은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심각한 문학 무역수지 불균형이다.


물론 얼마 전인 2018년 4월 김영하 작가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이 일본 번역 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국내 누적 100만 부 판매를 돌파했다는 소식에 비등하는 한국 문학 작품의 수출 성공담은 아직 듣지 못했다. 왜일까? 한국 출판사의 대 일본 홍보가 부족한 탓일 수 있다. 번역가 인력의 부족일 수도 있다. 번역가를 원작가의 보조자 정도로 치부하는 한국 출판업계와 대중의 인식이 기저에 깔린 탓에 번역 산업의 성장이 더딘 탓도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한국-일본 간 문화 교류의 양적, 질적 불균형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한국 백화점 지하 1층 여기저기에 자리잡은 일본 디저트 브랜드, 다운타운 내 건물마다 한 두 개씩은 자리잡은 이자까야나 일본 음식점들, 하루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본어들, 만화 카페에 꽂힌 수많은 일본 만화들, 1년에 50번 넘게 일본 곳곳을 여행한다는 한국의 젊은이들. 한국인들이 일상 속에서 소비하고 있는 일본 문화의 총량을 짐작케 한다. 물론 일본에도 한류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일본 사람들이 소비하는 한국 문화 상품들이 얼마나 많고 다양할지, 한국 내 일본 문화 상품들만 '파워'를 갖고 있을지는 미지수다. 얼마 전까지 일본 신주쿠에서 살았던 친구는 한국 삼겹살집이 예전만큼 호황을 누리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한다.


36년 일본 식민지 치하 굴욕의 역사에서 비롯된 한국의 대 일본 대항의식을 되살리자 말하는 것은 아니다. 종속이론을 주장하는 좌파적 시각으로 한국 내 일본 문화의  소프트파워가 팽창하고 있음을 개탄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더 이상 별다른 이슈가 아닌 '위안부 할머니'나 '소녀상'을 둘러싼 한일 간 외교 갈등과 같은 정치적 영역을 문화적 영역과 단순 연계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도 않다. 모든 문화 현상을 '권력'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습관에서 비롯된 괜한 우려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일 간 문화교류의 양적, 질적 격차가 점차 커지고 있다는 우울한 느낌만은 지울 수 없다.


1990년대 한 20대 젊은이의 감성을 흔든 대표적 성장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였다. 이후 2010년 신경숙 작가는 한국적 감성 가득한 성장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을 울리고>를 히트시켰다. 작품을 내놓은 신경숙 작가는 말한다. "청소년기를 앙드레 지드나 헤세와 함께 통과해온 세대가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청년기의 사랑의 열병과 성장통을 대변하는 것을 보며 뭔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써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이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 출간한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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