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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Sep 09. 2018

[서평] 붉은 손가락

히라시노 게이고 추리소설

오랜만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십여 년 전 추리소설 <붉은 손가락>을 읽은 이유는 정말 이런 것이었다.

나에게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를 묻는다면 '잊어도 좋기 때문에 읽는 것이 추리소설이다'라고 대답하겠다...읽자마자 순식간에 스토리를 다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 추리소설의 본령이다. 현대인의 독서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이루어지며, 자기계발과 스펙으로 환전되어야 한다. 추리소설에는 그런 강박이 없다...추리소설은 '독서=유동성'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부터 독자를 해방시켜준다. 추리소설은 읽은 것을 까맣게 잊어버려도 무방한 그 자체로, '기억하라!'는 문화에 복수를 한다...추리소설의 무용성은 그저 읽는 순간만으로 쾌락을 주고 숨을 쉬게 해준다. (시사인 571호, 장정일의 독서일기 중)


줄거리

40대 가장 마에하라 아키오의 중학생 아들 나오미는 집에 찾아온 일곱살짜리 앳된 소녀를 별생각 없이 목졸라 살해한다. 아들을 애지중지 응석받이로 키워온 어머니 야에코는 아들의 범죄를 은닉할 생각밖에 없다.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아키오는 아내 야에코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아키오는 살해된 소녀를 집 근처 은행공원 공중화장실에 유기한다. 시체를 발견한 경찰은 수사망을 좁히며 아키오와 야에코의 숨통을 조여 온다. 수사의 중심에는 형사 가가 교이치로와 그의 사촌동생이자 파트너인 마쓰미야가 있다. 부부는 아들의 범죄를 끝까지 숨기기 위해 급기야 자신들이 모시던 치매 걸린 어머니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 하지만...


모든 가족은 그들만의 사연이 있다

평범해 보이는 한 가족에게 들이닥친 어이없는 살인사건. 하지만 이 살인사건은 평범한 가정이 파괴되는 시작점이 아니라, 아키오 가족이 숨겨 온 비상식적 인격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 이들이 '평범'하게 살 수 없었던 사연은 무엇일까. '치매'라는 무서운 질병 앞에 무너지는 부모-자식의 관계, 제 자식만 귀한 줄 아는 비뚤어진 자식사랑으로 무너진 상식들은 한 가족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 전체에 숨겨진 '부끄러움'일지 모른다.


평범한 집이라고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 바깥에서 보면 평온한 가족으로 보여도 다들 이래저래 사연을 안고 있는 법이야.(형사 가가 교이치로의 말, p.137)

비상식이 상식이 되어가는 현대 사회의 자화상

<붉은 손가락>은 범인을 숨기지 않는다. 책에서 중요한 것은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다. 아들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부부의 술책과 이를 밝혀내는 영민한 형사 가가 교이치로의 사건 해결 과정이 관전 포인트다. 제 자식밖에 모르는 잘못된 모성애로 오염된 야에코가 만들어내는 '비상식성', 그 비상식성을 이겨내지 못하는 한 가족의 가장 아키오. 그리고 이 부부가 만들어낸 괴물, 아들 나오미. 특히 아들의 범죄가 아버지의 범죄로 옮겨가는 과정은 자못 서글프다. 화가 치미는 이들의 행태는 어쩌면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나와 우리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래서 <붉은 손가락>의 띠지는 "이보다 더 슬픈 추리소설은 없다!"며 소설을 소개하고 있다.


경찰에 전화할 거야(p.57)
경찰이 찾아오지 않기만을 빌 수밖에. 만에 하나 경찰이 우리집에 찾아오면...끝장이야. 그때는 그냥 자수하자(p.72)
속일거면 아주 완벽하게 속여야지(p.132)
- 아키오의 말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답게 <붉은 손가락>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를 책 속으로 끌어들인다. 다른 작품에 비해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가의 '매직'이 그리 화려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저 읽는 순간만으로 쾌락을 주"는 추리소설의 무용성이 이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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