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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Feb 24. 2019

나는 영어방송을 즐긴다

교포는 아니다

TV는 ‘바보상자’인가? 그렇다, 개인적 경험상으로는. 물론 가끔은 본다. 하지만 가끔이라도 볼 때면 영어방송을 본다. CNN 뉴스를 볼 때도 있고 미드를 보기도 한다. 미드를 볼 때는 한글 자막이 나오는 화면 아래쪽을 일부러 청테이프 같은 것으로 가려 한글 자막을 볼 수 없게 만들어 놓는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럴 리가... 흔히들 "많이 듣다 보면 영어가 어느 날 갑자기 ‘들린’다"고 하지만 경험상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들어도 한번 안 들리는 영어 단어나 문장은 영원히 들리지 않는다. 거의 접하지 못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말이나 태국 말을 많이 듣기만 한다고 해서 정말 언젠가는 알아 듣을 수 있을까? 영어든 다른 어떤 외국어든 단어를 한국말로 바꿔 이해하고, 외우고, 문장을 읽어보고 그 문장의 소리로 들어보는 일련의 ‘의식적’ 노력이 없으면 결코 외국어는 알아들을 수 없다. 10년 전 뭔 말인지도 모르고 리듬이 좋아 자주 듣곤 했던 팝송이 있는가? 지금 다시 들어보라. 지금도 여전히 리듬만 좋다. 영어를 많이 들으면 귀가 뻥 트인다고? 뻥치지 마시라.      


그럼 왜 오랜만에 TV를 보면서 하필이면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방송을 - 영어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 보는가? 그 이유는 바로 그 ‘알아듣지 못함’에 있다. 물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면 몇 마디는 알아들을 수 있다. 알아듣지 못하기에 TV를 보면서 - 듣는다고 하는 게 낫겠다 -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지금처럼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을 쓸 수도,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심지어 어려운 철학책을 읽을 수도 있다. 화면 아래 한글 자막을 가리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이다. 한글 자막이 보이면 자꾸 TV 화면에 눈이 가서 다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에게 TV는 스크린 달린 라디오. 그럴 바엔 그냥 라디오를 들으라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다. 덩치만 크고 전기만 축내는 화면 달린 라디오를 켤 바에야 핸드폰으로 24시간 들을 수 있는 라디오 앱을 플레이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BGM(Back Ground Music, 배경음악)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BGS(Back Ground Screen, 배경화면)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겠는가? 화면 달리지 않은 라디오가 주는 느낌과 화면 달린 라디오가 주는 느낌은 다르다. 그럴 수 있다. 불을 끄고 TV만 켜놓으면 촛불 켜 놓은 것만큼 운치도 있다. 화면 빛깔도 변한다.      


지금은 금요일 밤이니 한두 시간 열심히 TV나 보면서 맥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 OCN 같은 채널에서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따위를 틀지 않는 흔치 않은 기회가 생길 때면 그럴듯한 영화 한 편을 ‘때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리모컨에 있다. 리모컨이 쳐놓은 ‘채널 서핑’의 늪. 대여섯 시간 동안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TV만 봤는데 지나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게 하나도 없다. 10초 만에 한 번씩 누르는 +-채널 버튼. 이 엄지손가락 집중 강화 운동은 한번 시작하면 멈추기가 정말 어렵다. 그러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하나 걸리면 다시 한두 시간은 훌쩍. 그 프로가 끝나면 아쉬운 마음에 또다시 시작하는 채널 서핑. 방송을 보기 위해 채널 서핑을 하는 것인지, 채널 서핑을 하기 위해 방송을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전에 시작한 채널 서핑,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저문다.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움직인 건 엄지손가락 하나뿐인데 몸은 천근만근, 눈은 충혈되어 뻑뻑하다. 머리가 아플 때도 있다. 이 지경이 되면 몰려드는 왠지모를 텁텁함. 후회막심의 맛이랄까? TV가 바보상자가 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리모컨이 발명되면서부터 아닐까.      


그래서 나는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TV 때문이 아니라 리모컨 때문이다. 약속 없는 금요일 밤처럼 TV를 켜 놓아야 할 때는 영어방송을 틀어놓는다. 영어방송이 주는 편안함이 참 좋다. 그 편안함에 공감한다면 그대의 영어도...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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