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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Mar 15. 2019

[서평] 7번 국도-Revisited

김연수 작가의 <7번 국도>, 그 개정판

지루함을 결정하는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밀도다. 딱히 뭔가를 하기 애매한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시간의 밀도가 낮기 때문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귀갓길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5분 같은 시간. 그래서 나는 배차 시간을 확인하고 정류장 바로 앞 중고서점을 들렀고, 어지럽게 진열, 아니 방치되어 있는 책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소설 한 권을 뽑아 들었다. 


김연수 작가의 2010년 소설, <7번 국도-Revisited>. 천 원짜리 몇 장을 서점 주인에게 건네고는 서둘러 서점을 나와 막 도착한 마을버스를 탔다. 이렇게 가끔은 시간의 밀도를 높이는 방법도 괜찮다.      


김연수 작가는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통해 처음 접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별로 재미없었던 소설이었기에 읽던 중간에 책을 덮고 다시 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운동권 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탓인지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괜한 피로감이 소설을 읽는 중간중간 몰려와 읽기를 끝마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무심코 뽑은 김 작가의 <7번 국도-Revisited>에 대한 우려가 약간은 있었다. 싫어하는 스타일의 여자를 두 번 만날 때의 텁텁함 같은 것을 느끼진 않을까. 다행히 책장을 몇 장 넘겨보니 그런 텁텁한 우려는 사라졌다. 재밌게 읽혔다. 무엇보다 소설의 초반, 작가의 세련미 넘치는, 소설 속 인물을 묘사한 문단들이 눈길을 끌었다. 단순하게 인물에 대한 시각적 묘사를 나열하지 않고 다양한 요소를 입체적으로 꼬들꼬들하게 엮어낸 문장력이 돋보인다.      


“식료품을 사러 간 아파트 상가 지하 슈퍼마켓에서 나는 세희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봤다. 스물두 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중학생처럼 어딘지 미성숙한 차림새. 대를 이은 가난의 흔적이 아니라면, 불우한 환경의 그림자랄 수 있는 무표정. 이따금 만들어낸 것이라는 게 너무도 분명한 웃음. 그 모든 것들을 일거에 뒤집고 싶은 욕망이랄 수 있는 대담한 행동. 하지만 어디까지나 순수하기만 한 얼굴의 점들, 몇 개의 점들. 그리고 너무나 사적인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등과 가까이에서 들여다봐야만 보이는 노파의 표정. 내가 그녀를 제대로 본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그런 걸로는 세희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추측할 수 없다는 건 분명했다.”    -p.11


곧바로 이어지는 문단은 또 다른 세련미를 풍긴다. 주인공의 생각, 장을 보는 주인의 행동, 장바구니에 담긴 야채들. 이런 각각의 독립적 포인트들이 어떠한 접속사의 연결도 없이 자연스럽게 - 그리고 입체적으로 - 섞여 문단의 풍미를 높인다.      


“나는 다시 시작했다. 스물두 살. 학비 문제로 대학교는 중퇴한 상태. 카트를 밀고 가면서 일단 야채들을 담았다. 양상추, 당근, 피망, 감자, 양파, 브로콜리. 고향이 서울인데도 집을 나와서 친구 집에서 지내며 밤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생선 코너를 지날 때는 꽁치와 오징어를 집었다. 결정적으로 만취했을 때, 취중진담처럼 자신이 남자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 거짓말에 능하다는 상당히 강력한 증거였다. 그런 복잡한 추리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먹을 음식은 결정됐다.” - p.11


책을 읽다 보니, 책 제목 <7번 국도-Revisited>을 다시 보아도, 이 책은 일종의 개정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1997년에 출판된 김 작가의 <7번 국도>라는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설을 보니 “작가 김연수가 13년 만에 새롭게 선보이는 장편소설 『7번 국도 REVISITED』 특별판. 1997년에 출간된 <7번 국도>의 뼈대만 그대로 두고 처음부터 다시 쓴 새로운 작품”(네이버 책 정보)이란다.      


김연수 작가의 작품에 대한 무지, 그리고 중고서점에서 급하게, ‘무심코 뽑아 든’ 우연적 사건 때문에, 그리하여 어쩌다 보니 개정판을 먼저 읽게 된 셈이다. 다행히 책 <7번 국도-Revisited>는 1편에 해당하는 <7번 국도>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는, 일종의 독립성을 지닌 속편이었다. 동시에 전편의 내용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도 일으킨다.      


책 <7번 국도-Revisited>의 두 번째 특징은 - 아, 첫 번째 특징은 입체적 묘사가 뛰어난 문장력에 관한 것이었다 - 파편화된 시제(tense)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이다. 소설 속 인물 세희와 주인공 ‘나’가 잠자리를 갖고 난 후의 장면에서 - 다소 뜬금없이 - 소설은 시작된다. 소설 속 나와 잠자리를 가진 세희는 이렇게 말한다. “재현 오빠에게는 얘기하지 마세요.” 나와 재현, 세희는 어떤 관계일까. 궁금해질 때쯤 또 다른 장(chapter)이 시작. 소설 속 나와 재현이 포항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그 뒤에서야 비로소 주인공이 재현을 만나게 되는 계기를 이야기하고, 한참 뒤에야 또 다른 장에서 세희를 만나는 장면을 그린다. 파편화된 시제들, 뒤죽박죽 섞인 과거와 대과거의 순서를 재정렬하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 207쪽을 덮고 나니 작가의 메시지가 어렴풋이 남는다. 김연수 작가 자신이 보유한(보존하여 유지하고 있는) 기억과 경험의 파편들을 소설 속에서 재구성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남는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이 이 소설을 쓰게 만든 것일까. 책의 한 부분에서 그 단서를 찾아본다. 

     

스무 살 무렵의 기억은 웬일인지 너무나 희미하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내뿜는 광채가 너무 눈부시니까 그 빛에 가려져 그때 내가 어디에 있었고, 무슨 일을 했으며,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 듯. 밴드를 만들고 싶었지만, 대신에 거리에서 경찰을 향해서 돌을 던졌다. 그리고 또 무엇을 했을까?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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