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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Jun 27. 2019

종이봉투 한 장에서도 배울 게 있다

때론 사소한 것이 시간을 살린다.

누런색 종이봉투

후다닥 점심을 먹고 나니 정오가 조금 넘어 1시가 되기까지 30분 남짓 남았다. 문득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게 이런 것일까. 아무것도 안 하려 하니 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변태(정상이 아닌 상태로 달라짐)하고 있다.


쓸데없는 갈등에 허우적거리다 책상 한 구석에 놓인 조그만 누런색 종이 봉투를 발견했다. 며칠 전 6월 주말을 즐기기 위해 들렀던 식당에서 집어 온 것이다. 나이프와 포크를 담아 넣었던 봉투였다. 왜 이따위 종이 쪼가리를 집어 왔을까. 봉투에 그려진 일러스트 그림이 맘에 들어 가져온 것 같다.

종이봉투 하나에서도 배울 게 있다

영어가 빼곡히 박힌 종이봉투를 유심히 바라본다.


Cantina. 사전을 찾아보니 술집(saloon), 바(bar)라는 뜻이란다. 이런 단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을 아직 만나본 적은 없다.


Everyday is a Fresh start! 무한 긍정의 메시지. 매일이 새로운 시작이라... 새로운 시작이 매일 반복되는 것을 우리는 '방황'(wandering)이라 부른다. 방황의 무한 긍정성을 발견하다니, 대단한 봉투다.


찬찬히 읽다 보니 제법 모르는 단어들이 나온다.

Jalapeno. 흔히 말하는 할라피뇨의 철자가 j로 시작하는구나. 스페인어를 그대로 영어로 차용한 것이니 발음은 [h] 발음이다.


Cilantro. 허브의 일종인 '고수'의 잎으로 향과 맛이 강하다. 베트남 쌀국수에 없어서는 안 되는 허브지만, 없어야 먹는 친구들도 종종 있다.


Guacamole. 이건 정말 처음 보는 단어다. 네이버에 검색해 보니, 이렇게 나온다: "과카몰리(아보카도를 으깬 것에 양파, 토마토, 고추 등을 섞어 만든 멕시코 요리)" 구글 이미지를 찾아보니 이런 사진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 식당 - 종이봉투를 집어 왔던 그 식당 - 에서 과몰리를 먹었던 것 같다. 내가 뭘 먹는지도 모르고 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들 흉내낸다고 카메라폰으로 사진은 또 그럴듯하게 찍었다.

 


카메라폰이 생기고부터 언제 어디서든 카메라를 들이댄다. 시간과 공간을 저렇게 보이는 것으로 만들며 탕진한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말은 옳지 않다. 사진밖에 무엇도 남지 않게 된다. ... 그때 놓친 미세한 기미는 우리가 잡아야 할 진실이었을 것이다. 그 놓침이 탕진이다.
- 이규리 아포리즘
-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중


다행히 화이타(Fajita) 요리를 먹었던 것은 기억난다. 내가 좋아하는 멕시칸 음식이기 때문이다. 역시 기억의 시작은 '애정'이다. 종이봉투의 글귀를 보면 화이타 요리를 어떻게 음미하는지도 잘 나와 있다: "Feel the deep smoky flavor on the fajita grill! " 화이타의 ' 깊은 훈연 향'을 음미하는 것이 중요하다.


Mesquite Grill. 메스키트(남미산 나무. 숯을 만들거나 음식 굽는 불을 피울 때 흔히 쓰임)로 구운 석쇠 요리다. 메스키트 나무로 굽는 방식은 멕시코의 전통 요리 방식이다. (봉투에 쓰여 있다: ...the Mexican traditional mesquite grill method...) 이 방식의 요리는 '입맛을 살리는 데'(...stimulates your appetite) 제격이다.


때로는 사소한 것이 시간을 살린다

이렇게 종이봉투 한 장을 찬찬히 살펴보다 보니 30분이 훌쩍 지났다. 식당에서 집어 온 종이 쪼가리가 없었더라면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낼 뻔했다. 때로는 사소한 것이 시간을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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