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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Sep 20. 2019

나는 무엇인가

가방 속 물건들을 소개합니다

세상 살면서 가끔 미치도록 궁금한 것 중 하나가 '남의 가방 속' 아닐까. 저 사람 가방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얼마나 특별한 게 들어 있겠냐만은 남의 떡은 언제나 커 보이고 남의 가방은 언제나 신비롭다. 누군가 내 가방 속을 궁금해하지는 않을까? 그래서 오늘은 내 가방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낱낱이 공개한다.


우선 가방을 살펴보자. 블랙 성애자인 관계로 가방도 블랙 컬러가 주를 이룬다. 윗 뚜껑에도, 옆구리에도, 등받이 패드에도 주머니가 달려 있는, 실용주의가 너무 강조된 멋없는 백팩. 지퍼를 열어 그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순서는 윗 뚜껑에 달린 주머니부터 아래로 내려간다.


여행용 치약칫솔 세트. 며칠 전 편의점에서 샀다. 점심 먹고 사람 만나기로 했는데 입안이 텁텁하여 근처 편의점에서 샀던 걸로 기억한다. 3천 원이 조금 넘었던 것 같은데 당시 2천 원대의 세트를 살까 고민하다가 칫솔모가 좀 더 정교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3천 원짜리를 택했다.


인공누액. 콘택트렌즈를 끼는 관계로 가끔 눈이 건조해질 때를 대비하여 상비하는 물품 중 하나다. 참고로 인공누액은 '점안액'이라고도 부르는데 보통 히알루론산나트륨이라는 성분이 들어있다. 안구건조증이 좀 심한 사람들은 이 히알...나트륨 농도가 더 진한 점안액을 처방받기도 한다(고 약사한테 들었다).


휴대용 키보드. 종종 시간이 날 때마다 간단한 문서를 작성하거나 긴 메시지를 남길 때 유용하다. 3단으로 접히는 휴대용 키보드인데  스마트폰과 블루투스로 연결하면 웬만한 랩탑 컴퓨터가 부럽지 않다. 거의 항상 휴대하는 필수품 중 하나.


책. 가방 속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안방마님쯤 되겠다. 강의 하나를 맡는 바람에 들고 다니는 교재 한 권과 김연수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이 가방 안에 들어 있다. 지난주부터 읽은 책인데 3분의 2 정도 있었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연유도 이 책  때문이다. 산문집 안에 있는 한 편의 글에서 힌트를 얻었다. 작가는 '호수가 얼어붙은 날의 문장들'이란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책에서 읽은 문장을 삶에 금방 적용한다.-p.224


책에서 작가는 퀘이커교도 필립 한든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소개한다. 노란색 표지의 투박한 표지가 눈에 띄는, 제목이 <소박한 여행>이 책에는 "그동안 이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물건들의 리스트가 나온다"라고 한다. 예를 들면,

페루 오지의 원주민 마을 푸에르토 오코파를 찾아가는 미국의 영화 제작자 윌 베이커의 장비 목록은 다음과 같다. 침낭, 모기장, 나일론 끈, 성냥과 양초, 벌채용 칼, 스위스칼, 여벌 바지, 셔츠, 양말...


문장을 삶에 바로 적용하는 걸 즐기는지, 김 작가도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들을 소개한다. "...쌓여 있는 책들, 아직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노래가 수두룩한 시디들, 세 개의 MP3,  오디오 세트..."


릴레이 독서라고나 할까. 나도 김 작가에 이어 내 가방 속 물건들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어서 내 가방 리스트를 작성해 보면,


노트. 이런저런 것들을 끄적이는 게 습관이다 보니 종이노트 한 권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도 시들해져 적어놓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린다. 스마트폰이라는 훌륭한 메모 도구를 항상 들고 다니긴 하지만, 그래도 종이 노트가 더 유용할 때가 있다.  한 잔 하면서 세 줄 일기라도 쓸 때면 마음이 가라앉는 심리적 효능도 가진다.


볼펜. L로 시작하는 독일 브랜드의 볼펜. 플라스틱으로 만든 볼펜 치고는 꽤 비싸다. 이 볼펜 하나 살 돈이면 모나미 153 볼펜을 200개 정도 살 수 있었다. 그래도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짜리 만년필도 있는데 항상 쓰는 물건에 몇만 원은 쓸 수 있지 않겠나.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항상 들고 다니는 물건은 이뻐야 한다. 무조건 이뻐야 한다." 이 볼펜도 이뻐서 샀다. 두툼한 그립감도 마음에 든다. 항상 쓰는 물건은 무조건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값이 비쌀수록 내 마음에 쏙 안길 때가 많다.  


스마트폰. 구닥다리 폰을 떠나보내고 얼마 전에 구입한 새 폰이다. S사의 노트 9. 약정할인이다 뭐다 해서 싸게 산 것 같았는데 다시 따져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볼 때마다 '정말 싸게 산 것이 맞을까'라는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 싸게 주고 산 거야. 최신 스마트폰 치고는 싸게 주고 산 거라며 인지부조화를 통한 자기 위안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중이다.  돌아다닐 때, 지하철을 탔을 때, 시간 날 때도 웬만하면 안 보려 아예 가방에 넣고 다닌다.  매번 스마트폰이 필요해 꺼내면 딴짓만 하는 고질병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일부러 가방에 넣어 둔다. 이메일 한 두 개 놓쳤다고, 카톡 메시지 좀 늦게 확인한다고 큰일 나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 밖에 자질구레한 물건들 몇 개가 가방 주머니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휴대폰 충전기. 언제 가방 속에 들어갔는지 모르는 네모난 모양의 박하사탕. 미니 CK 향수병(아마도 땀나는 여름을 대비해 넣어 둔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카페에 들렀다가 챙긴 냅킨 한 뭉치. 언제 구겨 넣은 것인지, 아직 안 쓴 냅킨인지, 쓰고 나서 길거리에 버리기 뭣 해 다시 가방에 넣어 뒀던 것인지 구별이 잘 안 간다.


가방 속 주머니를 다 뒤져봐도 더 나올 것은 없다. 가격 높은 순으로 가방 속 물건을 재정렬해보면 다음과 같다. 스마트폰, 미니 향수, 볼펜, 휴대용 키보드, 책, 종이 노트, 휴대폰 충전기, 치약칫솔세트, 점안액, 그리고 카페 냅킨. 방 속 신비의 세계가 별 것이 없다.


런데 바로 여기에 삶의 묘미가 숨어 있다. 내 가방 속 물건 중에서 내 삶에 진정 위안이 되어 준 물건은 무엇일까? 나의 삶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물건은 무엇일까? 마음의 양식이자 사람을 만든다는 책? 왜, 이런 말 본 적 있잖나,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아니면 전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IT기술의 결정체, 스마트폰? 아님 노트? 볼펜?


아니다. 경험상 내 삶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절박한 순간에서 날 구해줬던 물건은 냅킨이었다. 카페에서 쓰고 남아 가방 한 구석에 쑤셔 넣었던 그 냅킨. 급한 볼일로 화장실에 갔다가  휴지가 없어 대략 난감할 때 한 줄기 희망이 되어 주었던 냅킨. 물을 엎어 바지가 젖을 때도 온몸 바쳐 물기를 빨아올려주었던 냅킨. 사람 붐비는 거리에서 문득 울컥 올라오는 가래를 말없이 받아주던 냅킨. 그때 냅킨이 없었더라면 사람 많은 길거리 한복판에 가래를 뱉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다시 삼킬 수도 없는, 이 찝찝하고 난감한 고통의 순간에서 나를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냅킨이었다. 전화통화하다가 급한 맘에 볼펜 들고 두리번두리번 메모지 찾다가 발견한 것도 냅킨이었다. 가방 속 냅킨처럼 내 삶 속 급박하고 난감한 순간에 히어로가 되어 준 물건도 없는 것 같다.


때론 거의 공짜로 얻다시피 한 물건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있다. 사람도 아주 친한 사람보다 그저 인사 정도 나누는 '얇은' 인연이 나의 급박한 필요에 손을 내밀어 줄 때가 있지 않던가. 고매한 것과 하찮은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관념의 세계, 철학의 세계는 물리적 세계 앞에서 초라해진다. 현인의 지혜를 담은 고전 한 권도 한 장의 구겨진 냅킨보다 나을 것이 없을지 모른다. 마음이 몸을 지배한다고 배웠지만 살면 살수록 그 반대임을 깨닫는다. 감성보다는 물성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 같다. 자아라는 것도 그저 가방 속 물건들의 합에 불과할지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아니, 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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