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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Sep 22. 2019

'바쁨'의 품질

바쁘다는 말은 하지 말자

요즘 좀 바쁘다. 어쩌다 보니 프리랜서의 삶을 살고 있어 몸을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속된 말로 먹고살기 힘든 삶의 구조다. '바쁘다'라는 말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말 중 하나라고 착각했을 때가 있었다. 할 일이 많고, 오라는 데도 많으니, 그래서 내가 요즘 내가 좀 잘 나간다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쁘다란 말처럼 프롤레타리아의 서글픔을 나타내는 말도 없다. 내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돈 나올 구멍이 없는, 노동소득이 곧 나의 전체 소득이 되는 순도 100% 노동자의 삶. 그야말로 먹고살기 바쁜 고달픈 삶. 그래서 바쁘다는 말은 해서는 안 되는 말 중 하나다. 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누군가 "요즘 바빠?"라고 물어보면 뭐라 답해야 할지, "응 , 좀 바빠"라는 찌질한 대답을 대체할 수 있는 말을 개발 중이다. 이제부터는 누군가에게 요즘 바쁘냐는 안부 인사도 묻지 않으려 한다.


사실 '바쁘다'라는 말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 금(gold)처럼 그 자체로 의미와 가치를 직관할 수 있는 말과는 대비된다. 바쁘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결과가 발생하느냐에 따라 '바쁨'의 품질이 결정된다. 바쁜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삶이다. 바쁘면 바쁠수록 나의 욕망(desire)이 채워지는 선순환이다. 더 바빠져도 괜찮다. 일이 쉼이요, 쉼이 곧 일이니 쉬다가 힘들면 좀 쉬다가 다시 쉬면 되는, 극도의 쾌락 세계. 아니면 정신 착란의 세계.  그래서 바람직한 삶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인(ideal) 삶에 가깝다.


바쁘지만 그래도 틈틈이 다른 일도 하고, 쉬기도 하고, 그래서 불만이 없다면, 그것은 좋다. 그만큼 효율적인 시간 관리를 통한 워라밸을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욕망 밖에서 살다가도 때가 되면 욕망의 품으로 돌아간다. 일과 휴식, 피로와 회복, 인내와 성취 같은 대비가 경쾌한 삶의 리듬을 만든다.


바빠서 다른 걸 할 시간이 없고, 하고 싶은 것을 전혀 못한다면, 그야말로 의미 없는 바쁨, 찌질한 바쁨이다. 철저하게 내 욕망의 밖에서 노숙하는 피곤한 삶이다. 이건 좀 문제가 있다. 바쁘지 않을 땐 뭘 해야 좋을지 모른다면 그것도 문제다. 그럴 땐 그냥 바쁘게 돈이나 버는 게 오히려 정신 건강에 낫다.


내 '바쁨'의 품질은 어느 정도일까. 노숙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때가 되면 언제든지 욕망의 품으로 귀가하는 워라밸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 심각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개선의 여지가 있다.


해답은 효율성(effectness)에 있다. 바쁨의 생산성을 높이는 수밖에. 즐겁지 않은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집중해서 빠른 시간 내에 끝내 버리는 '화끈함'이  필요하다. 즐거운 일이라면 최대한 몰입해서 그 즐거움을 만끽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즐거운 일에나 즐겁지 않은 일에나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이 필요하구나. 결국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인과관계란, 노력의 결과를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즉석복권과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그 보답이 즉각적으로 내게 찾아온다. ...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면 멋 훗날 큰 보답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부록 같은 것이다. 진짜 최선을 다하면 그 순간 자신에 얻는 즐거움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김연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 '뛰지 않는 가슴들, 모두 유죄'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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