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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Oct 13. 2019

[서평] 붉은 낙엽

우리의 의심을 의심해야 한다

프레임의 세계

   객관의 세계는 거의 없다. 경험상 그렇다.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객관성과 합리성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순도 높은 합리성은 환상에 가깝다. 학자들은 완전무결한 합리성을 축소하고 제한적 합리성을 제시한다. 아예 인간은 비합리적이라고 선언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은 본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만을 본다. 이를테면 우리는 프레임(틀)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성급히 구축한 각자의 프레임은 곳곳에서 충돌한다. 프레임 속에 갇힌 사람도, 프레임 바깥을 맴도는 사람도 모두 피해자다.     


   이렇게 위험한 프레임의 세계는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토머스 H. 쿡의 소설, <붉은 낙엽>은 그 근원을 ‘의심’에서 찾고 있다. 주인공 에릭의 외아들 키이스가 이웃 소녀의 유괴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자연 발화하는 수많은 의심들. 의심은 그야말로 “산(酸)”처럼 에릭의 마음을 부식시키고 그의 가족을 무너뜨린다. 논리와 증거 – 증거처럼 보이는 것들 – 는 자의적으로 편집되고 또 다른 의심의 재료가 된다. 작가는 이렇게 의심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간의 취약한 내면을 농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118809


의심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절망

   무엇보다 소설 <붉은 낙엽>은 서글프다. 그 서글픔은 의심의 늪에 빠진 사람들의, 허우적대지만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종의 ‘무기력함’에서 기원한다. 의심하는 자, 의심받는 자 모두 “피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공포스러운 의심(p.307)”앞에서 무력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증오해야 하기에, 사랑받지 못했기에, 때로는 두렵기 때문에 모두 의심 앞에서 처참히 무너진다.      


   의심하는 자는 무기력하다. 첫 번째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를 딛고 새로운 가정을 이룬 에릭에게 아들 키이스는 그 누구보다 소중하다. 범죄자로 몰린 키이스, 그를 너무나 사랑했던 아버지였기에 에릭은 스스로의 사소한 의심에도 민감했고 초점을 흐리는 증거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외동딸을 유괴당한 에릭의 이웃 빈스 지오다노. 딸을 잃어버린 슬픔에 누군가를 증오해야 했고 용의자 키이스에 대한 의심은 너무나도 쉽게 확신으로 굳어진다. 에릭의 단골 고객 펠프스 부인마저 두려움과 자기 보호 본능 때문에 키이스의 유죄를 추정하고 피한다.     


   의심받는 자 또한 무기력하다. 수줍고 내성적인 탓에 가족의 기대에 못 미쳤던 키이스. 그 앳된 소년이 자신을 향한 의심에 항거하는 방법은 그저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p.264)”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의심받는 자의 왜소한 자아는 에릭의 형 워렌의 모습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랑스러운 아이’였던 여동생 제니는 일찍이 죽었고, 어머니는 자살했다. 아버지는 워렌을 경멸했고, 동생 에릭은 그를 실패자로 규정한다. 에릭과 달리 워렌은 사랑해야 할 사람들, 지켜야 할 ‘두 번째’ 가족도 없었다. 확장 편향되는 의심으로 에릭은 급기야 워렌을 유괴 용의자로 몰아간다. 의심받는 자의 슬픔은 결국 자살로 끝난다. 워렌이 자신에게 총을 겨누며 동생 에릭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에릭... 이제 너의 골칫거리는 끝이다.(p.308)”     


   소설이 주는 절망감은 유능한 변호사 레오의 냉정함마저 무너지는 장면에서 고조된다. 의심하는 자를 경계하고 의심받는 자를 보호해야 하는 법조인 레오마저 의심의 함정에 빠지고 워렌을 ‘뭔가 잘못된’ 사람으로 오판한다.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완결된 믿음을 구축하기가 이 얼마나 어려운가. 의심의 함정에 가장 취약한 사람이 변호사 레오였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재판 경험이 많은 법조인일수록 유죄 추정의 경향이 높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의심하는 자, 의심받는 자,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자. 이들 모두 의심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책을 덮어도 잔영으로 남는다.      


   의심이 “산”처럼 인물들의 내면을 부식시키는 것과 같이 소설의 절망감은 아래로, 아래로 바닥을 향한다. 진범이 밝혀지고 키이스가 누명을 깨끗이 벗어난다 한들 에릭의 가족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유괴된 딸의 아버지 빈스는 에릭과 예전처럼 친근한 이웃으로 지낼 수 있을까? 사소한 의심을 무한 확장시켰던 에릭의 과오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다시는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예요(p.193)”라고 말하는 에릭의 아내. 그녀의 “어둠의 선언”은 의심으로 부식된, 사람들에게 남겨질 영원한 내면의 상처를 예고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의심을 의심해야 한다

   소설 <붉은 낙엽>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범인, 범행 동기, 범행 과정이라는 추리소설의 3요소 중 범인만을 밝힐 뿐, 범행 동기와 범행 과정은 작가의 관심 사항이 아니다. 주인공의 내면을 미시적으로 관찰하고 있어 캐릭터 중심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주인공의 심리가 걷잡을 수 없이 변태하는 과정을 짜임새 있게 그려낸다. 플롯 중심의 소설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의심이 산(酸)처럼 주인공의 내면을 바닥까지 부식시키는 과정은 생생하고, 그래서 때로는 공포감마저 든다.      


   이 정체 모를 소설이 안겨주는 절망감은 사뭇 크다. 의심의 늪에 한번 빠지면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가라앉는 인간의 취약한 내면은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것일까? 의심의 찌꺼기로 구축된 각자의 프레임의 세계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프레임에 빠져 허우적대는 선의의 피해자를 구원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설 속 주변 인물, 비록 야망 없는 게이였던 닐이 했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죄가 증명될 때까지는 결백한 거 아닌가요?(p.117)”우리는 서로 좀 더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구축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의심을 의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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