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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Jan 20. 2020

7등급의 피가 필요해

학벌, 한국사회 최강의 프로파간다

한국 사회를 이끄는 최강의 프로파간다, 학벌

얼마 전 한 스타 수학강사의 발언으로 여론이 들끓었다. “7등급은 지이잉 ~ 용접 배워서 호주 가야 돼.”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수험생 고민 상담해준답시고 한 말이란다. 공부 못하면 용접이나 배워 호주나 가라는, 공부 못함에 대한 학벌사회의 경멸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론의 격렬한 비난에 강사는 곧 사과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스타 강사의 ‘못된’ 발언이 한 개인의 못된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란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학벌사회가 한국에 공고하게 뿌리내린, 구조적 문화라는 점을 모르는 이 없다. 구조적 문화는 공식적 제도보다 강력하다. 비공식적이지만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을 거의 언제나 구속한다. 쉬쉬하지만 사람들은 학벌 중시 문화가 만든 ‘서열’을 인정하며, 오히려 숭상한다. 한 때 학벌사회를 비판하며 개선을 외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학벌사회를 쿨하게 인정하고 때로는 권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느덧 자포자기와 더불어 학벌 사회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더 재밌는 것은 이렇게 학벌사회를 권장하는 이들이 다름 아닌 교육자들이란 점이다. 일부 중고등학교 교사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학원 강사들은 학생들 앉혀놓고 ‘학벌사회’를 권장한다. 얘들아, 자면 어떡하니. 열심히 공부해야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야지. 멋지게 살고 싶으면 좋은 대학 가라. 네가 나온 대학, 평생 너를 따라다닌다. 그러니, 선생님이 하는 말에 집중!     


학생들의 의지를 부스팅하고 동기를 선동하는 가장 쉽고 강력한 프로파간다는 바로 ‘학벌’이다. 밤새워 공부하고 치열하게 시험 봐서 일류 대학에 들어간 사람의 ‘멋짐.’ 초중고 12년의 세월 동안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의는 바로 이 ‘멋짐’이다. 학생들은 매일같이 이 ‘멋짐’에 취해 오늘도 잠을 줄인다. 한국 사회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결하고 명확하다. 좋은 대학을 가야 하니까. 좋은 대학은 곧 질 좋은 삶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비공식적 공식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한국 교육의 실질적 근본취지이자, 공인된 일종의 진리에 이르렀다. 성급한 일반화라고? 아닐 수도 있다.      


비(非)학벌사회는 공부 못한 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어느 칼럼의 필자는 학벌사회 극복을 위해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좋은 말이나 공허하다. 왜냐하면, 거의 언제나 같이 잘해보자는 선의(good will)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벌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질문이 틀렸다. 한국 사회는 이미 유토피아다. 좋은 대학 나온 자들의, 이들에 의한, 이들을 위한 유토피아. 이 유토피아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이 땅에 건설되었다. 학벌사회는 인간의 ‘선’이 아닌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근간으로 구축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대학 들어간 자들의 유토피아다.     

 

그렇다면 학벌사회의 종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공론화? 제도적 개혁? 정치적 의지? 인식의 변화? 모두 틀렸다. 유토피아를 붕괴시키는 힘은 반대편 디스토피아에서 나온다. 한국 사회의 학벌 중시 DNA를 파괴하는 힘은 결국 공부 못하는 자들의 ‘투쟁’에서 나온다는 얘기다. 공부 못한 자들의 건전한 반란만이 학벌사회를 극복할 수 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고 높은 연봉을 받고, 여기저기 괜찮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기득권자다. 학벌사회를 통해 욕구와 이득을 챙긴 사람들이다. 이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리 없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할 마음은 없다. 비난할 이유도 없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동정표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역사적으로 동정표가 과반수를 넘은 적이 있던가. 동정표에는 ‘독립성’이 결여되어 있다. 독립하지 못하고 홀로 서지 못하는 인간, 사회, 국가는 지배당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부 인간들은 언제나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고, 그들만의 한몫을 챙겼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시민들은 ‘자유’를 챙겼고, 미국은 독립전쟁을 통해 1776년 어마어마한 땅을 챙겼다. 한국은 독립투쟁을 통해 1945년 주권을 챙겼지만, 투쟁의 힘이 약해 강대국들의 ‘동정’에 의존했다. 그 결과 우리는 아직도 분단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결국 공부 못하는 자들의 투쟁과 반란만이 학벌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 아니, 학벌사회와 공존하는 비학벌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 “7등급이 지이잉 ~ 용접 배워서” 열심히 일해 높은 연봉받고 문화생활도 즐기고 사회적 권력을 득하는, 이른바 건전한 투쟁의 소소한 역사들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공부 못한 자들의 이러한 ‘멋짐’이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 한, 학벌중시 풍조는 무너지지 않는다.      


공부 못하는 자들의 ‘개인적’ 투쟁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개인적 투쟁과 더불어 공부 못한 자들의 ‘연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학벌사회에 대한 집단적 대응이 없으면 힘들다.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연대’ 밖에 없다. 뭉치는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약자들의 자발적 모임, 협회(association) 같은 것 말이다. 미국의 작가협회를 보라. 작가들이 모여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한다. 원고료 떼여도 말 못 하고, 저작권 침해당해도 할 말 못 했던 작가들이 모여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강력한 – 동시에 정당한 – 집단을 만들었다.      


‘학벌’이 사라진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학벌이 사라지면 유토피아인가. 용접 7등급은 끄적끄적 ~ 공부나 해서 서울대라도 가야 먹고사는 사회가 되면, 그것이 유토피아인가. 현실적 유토피아는 기득권과 비(非)기득권이 다원적으로 공존하는 민주주의 사회다. 기득권도 한몫 챙기고, 비기득권도 한몫 챙겨 나름대로 잘 살아가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력의 배분. 이러한 배분으로 달성하는 힘의 균형. 이것이 우리가 구축할 수 있는 유토피아의 상한선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공부 못하는 자들의 건전한 투쟁과 연대가 필요하다. 이들 스스로 만들어 낸 사회적 ‘멋짐’이 필요하다. 기득권자들의 선의 따위는 기대하지 말자.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토마스 제퍼슨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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