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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Feb 06. 2020

뭐라도 쓰란다

뭐라도 써진다

도서 유통회사  YES24에서 매월 발간하는 매거진, <채널 예스>의 2020년 2월호는 '글쓰기 최고의 비법'을 소개한다. 그것은 바로 ‘뭐라도 쓰는 것’이란다. "정말 뭐라도 쓰는 게 쓰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얘기를 강조한다. 엄청난 비법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너무 뻔한 비법이라 오히려 놀랐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뭐라 딴죽을 걸 수도 없는 말이다. 매거진은 찰스 부코스키가 1990년 <콜로라도 노스 리뷰>의 편집자에게 썼다는 편지도 소개한다.

작가는 책 몇 권 썼다고 작가가 아니오. 작가는 문학을 가르친다고 작가가 아니오.
작가란 지금, 오늘 밤, 지금 이 순간 쓸 수 있을 때만 작가요.


뭐라도 계속해서 쓰라는 말에 나도 지금 뭐라도 써보려고 한다. 그런데 그 '뭐라도' 쓴다는 것 역시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요즘 급성 결정장애에 걸린 나로서는 뭐라도 쓰기 위해 그 ‘뭐’를 결정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뭐라도 써야 되겠기에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기껏해야 한 문장 정도밖에 쓸 말이 없어 섣불리 결정하지도 못하겠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앉음뱅이 소파에 대해서 써볼까도 싶었다. 이 소파는 2인용이고 연두색과 카키색과 노란색의 그 어딘가를 차지하는 오묘한 색깔을 지닌 패브릭 소재의 소파다. 15센티미터 정도의 굵직하고 동그란 소파 다리가 있었는데 무게 많이 나가는 내가 생각 없이 털썩 소파에 앉는 바람에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 버리기 아까워 다리 네 개를 모조리 뽑아버려 졸지에 좌식 소파가 되었다. 그런데 웬걸, 오히려 이렇게 앉음뱅이가 된 소파가 더 편하다. 땅에 밀착되어 안정감을 주면서도 소파의 기분도 느끼게 해 주니 의도치 않은 발견이라면 발견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소파에 대해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책상이 보이니 책상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자면, 내 서재방엔 책상이 두 개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하나가 더 있으면 업무 효율성이 2배 이상은 높아질 것 같아 일 년 전 이케아에 가서 검은색 사각형 책상 하나를 더 산 것이다. 가격은 3만 원 안팎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케아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되어 준 책상이지만, 이후에 이케아를 다시 간 적은 아직 없다.


원래 있던 책상은 첨단 디지털 기기로 무장한 업무용 책상이다. 15인치 노트북, 그와 연결된 24인치짜리 모니터. 멀티 모니터 체제를 구축했다고나 할까. 멀티 모니터를 써본 사람들은 안다. 이게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 아무튼 이 책상에서는 주로 논문을 쓰거나 가끔 온라인 주식 거래를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 책상은 자본주의와 연결된 하나의 세계다.


 이케아 책상은 원래 놓여있던 책상의 오른쪽에 놓여있다. 두 개의 책상이 그리는 형상은  ㄱ자 형태이다. 의자 하나를 두고 이쪽 책상에서 저쪽 책상으로 이동하는데 최적화된 레이아웃인 셈이다. 이 오른쪽 이케아 책상에서는 아날로그 냄새가 풀풀 나는 작업을 주로 한다. 아침에 신문을 읽는다거나 (맙소사, 가끔 신문 한 귀퉁이를 칼로 오려내고 종이 어딘가에 풀을 발라 붙이는 80세 노인이나 할 법한 일도 한다) 책을 읽으며 간단한 메모를 한다거나, 종이노트에 무엇인가를 끄적인다거나, 아무튼 이 두 번째 책상은 종이와 볼펜으로만 구성하는 클래시컬 아날로그의 질서가 지배하는 구세계다. 이 책상에는 웬만하면 디지털이 금지된다. 노트북도, 계산기도, 스마트폰도 이 오른쪽 책상 위에 착륙할 수 없다. 뭔가 정갈한 정신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정한 나름의 규칙이다.


오른쪽 책상 바로 옆에는 또 하나의 선반이랄까 낮은 키의 테이블이랄까, 암튼 그런 형상을 가진 물건이 하나 있다. 가로 1미터 세로 60센티미터, 높이 60센티미터 정도의 검은색 테이블인데 그 위에는 작은 크기의, 턴테이블이 장착된 중저가 오디오가 하나 있다. LP의 느낌을 다시 재현해보고자 턴테이블 기능이 있는 오디오를 샀는데, 정작 턴테이블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올려놓을 LP판이 거의 없기 때문인데, 요즘 LP 한 장 값은 삼사 만원 정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마크 알몬드의 1978년 앨범 <Other people's room>은 7만원인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튜브에는 LP에 담긴 음악들과 그와 유사한 음악들과 그 LP 속 가수가 부른 전곡들과 또 그 가수의 베스트 곡만을 엄선한 콘텐츠들이 실시간으로 제공된다. 유튜브는 아직 무료다. LP는 이제 청각을 위한 디바이스가 아니라 시각을 위한 인테리어다. 나는 방 꾸미기엔 큰 관심이 없으니, LP가 없는 이유는 가격 때문이 아니다. 비싸서 못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디오 옆에는 3개월 넘게 키워 온 개운죽 한 묶음이 있다. 이런저런 식물을 키워 보았는데 개운죽만큼 간편하게 키울 수 있고 잘 죽지 않는 식물도 없다. 쭉쭉 위를 향해 뻗어나가는 잎사귀의 모습도 당차다. 그 옆에는 아이비가 심긴 화분이 하나 더 있다. 아이비 넝쿨이 꽤나 많이 자랐었는데 관리를 잘 못해서인지 줄기들이 모두 죽고 지금은 한 줄기에 붙은 잎사귀 몇 개가 연명하고 있다. 올봄에는 베란다에 놓아 볼까 한다.


쓰다 보니 서재방에 대한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서재방에서 책상과 짝을 이루는 책장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다. 방에는 책장도 2개가 있다. 하나는 너비가 약 50센티미터, 폭도 약 50센티미터, 높이는 2미터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삐쩍 마른 키다리 책장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책장의 대각선 맞은편에는 비슷한 너비와 폭에 높이가 1미터 정도 되는 작은 책장 하나가 더 있다. 키다리 책장에는 전공책과 소설책이 두서없이 꽂혀있는 반면, 키다리 반만한 책장에는 전공 관련한 책들만을 꽂아 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 작은 서재에도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있다. 신세계와 구세계가 나름의 견제와 조화의 균형을 이루고 있고, 크고 작음의 리듬도 갖추고 있다. 의도치 않은 편안함도 존재하고, 내가 아닌 다른 생명도 살고 있고, 음악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에는 이 무겁고 텁텁한 책들과 언제 생겼는지 모를 잡동사니들을 모두 버려 버리고 100% 전자책 체제를 구축해서 책상과 의자, 그리고 노트북, 이 세 가지만으로 거의 모든 것을 처리하는 궁극의 미니멀리즘을 구현해 볼까 하는 욕심도 생긴다. 하지만 또 한편, 책들과 잡동사니들이 주는 아날로그적 물성이 사라진 서재의 삭막함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또 마음이 약해진다.


뭐라도 쓰라고 한 말에 이끌려 뭐라도 쓰다 보니 어느덧 서재 관찰기 한편이 완성된 것 같다. 매거진에서 말한 비법이 정말 약발이 있기는 하구나. 뭐라도 쓰라고 해서 뭐라도 썼으니, 이제 나도 작가로 인정해달라!(고 찰스 부코스키에게 편지라도 한 장 또 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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