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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Jun 25. 2019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

초여름과 소설의 상관 관계

초여름, 그리고 소설 읽기

언젠가부터 소설을 즐겨 읽기 시작했다. 돈벌이에 거의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잉여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오히려 돈벌이가 채워줄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을 소설이나 산문이 채워줄 수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초여름을 좋아한다. 무척이나 좋아해서 아무 이유 없이 오뉴월이 되면 기분이 들뜨곤 한다. 5월과 6월의 계절만큼은 성실하게 즐기고 싶다. 5월 한 달, 6월 한 달이 아니라 31번의 5월, 30번의 6월을 느끼고 싶다. 예컨대 어느 일본 작가는 5월 단오 하루를 이렇게 즐겼다.  


이날은 편지 보낼 때 보라색 종이에 백단향 꽃을 싸서 보내거나, 푸른 종이에 창포 잎을 가늘게 말아 묶어서 보내거나, 아니면 흰 종이를 창포의 하얀 뿌리로 묶어서 보내는 것이 풍류 있다.
- 세이쇼나곤, <마쿠라노소시>, 단오절 예찬 중


초여름의 쾌청한 날씨, 푸르른 나무와 숲, 시원한 낮바람과 서늘한 밤바람에 나는 감동한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 앉아 초여름을 즐겨도 좋고, 보라매 공원의 수련 잎사귀를 보며 초여름을 만끽해도 좋다.      


마로니에 공원의 초여름과 보라매 공원의 초여름은 다르다. 서울의 초여름과 뉴욕의 초여름이 다른 것처럼. 그런데 나의 입에서 나오는 감탄사는 어딜 가나 그저 “아, 좋다”라는 말뿐이다.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내 마음은 각기 다른 색채와 강도의 감정을 생성하지만 그것들을 말로 표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각기 다른 감정을 ‘언어화’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여러 겹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를 경험해보지 못해서일까. 그토록 눈부신 초여름의 감동을 ‘기쁨’이라는 단어 하나로 둥친다.     


...우리를 둘러싼 언어의 세계가 여러 겹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제일 바깥쪽을 추상적이고 큰 단어들, 예컨대 평화, 정치, 슬픔, 절망 따위의 단어들이 단단하게 감싸고 있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구체적이고 작은 단어들이 숨어 있다.
- 김연수, <소설가의 일> 중     


그래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구체적이고 작은 단어들로 거칠거칠한 감상과 감동을 세공하고 싶었다.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감정을 언어화하는 능력은 소설의 힘”이다.

    

소설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동시에 자기의 감정을 받아들여 내 감정에 언어를 부여하는 능력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요.
- 김영하 작가의 어느 인터뷰 내용 중     


나무 한 그루에서 익은 숲의 냄새를 느낄 수 있다면

마로니에 공원을 지키는 늙은 마로니에 나무를 보는 나의 감상은 이렇다. 아, 좋다. 그리고 또...아름답다. 정원 가꾸기를 좋아했다는 작가, 헤르만 헤세는 좀 달랐다. 나무 한 그루에서 ‘익은 숲의 냄새’와 '슬픔의 잉태'를 포착한다.      

전나무 아래서 쉬고 있노라면 지난날이 생각난다. 익은 숲의 냄새가 최초로 소년의 슬픔을 잉태했던 그날의 바로 이곳이었다.
- 헤르만 헤세, <너로 하여 위안을 받으며> 중


헤르만 헤세의 책 <너로 하여 위안을 받으며>를 읽으면 너도밤나무, 플라타너스, 마로니에, 전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서 느끼는 ‘감동’의 형체와 색채가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보라매공원을 거닐며 내가 좋아하는 ‘연꽃’을 볼 때도 나는 그저 ‘아름답다’라는 감상만을 구성해 낼 뿐이었다. 한데 김훈 작가는 연꽃을 보며 ‘고요하고 차분한’ 아름다움을 도출한다.      


연꽃은 활짝 피어 있어도 소란스럽지 않다. 연꽃은 늘 고요하고 차분하다. 연꽃은 절정에서도 솟구치지 않고 안쪽으로 스민다. 홍련이나 백련이나, 연꽃의 색깔은 이 색에서 저 색으로 흘러가고 있다.
김훈, <연필로 쓰기>, ‘호수공원의 산신령’ 중     


그의 에세이를 읽고 나니 보라매공원 연못, 막 꽃을 피우려는 연꽃 봉오리에서 “솟구치지 않고...고요하고 차분한” 초여름을 느낀다. 더구나 이승우 작가의 소설을 읽고 나면 연꽃에서 야릇하고 오히려 슬픈 감정도 느낀다.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 사창가를 연꽃시장이라고 불렀다. 촘촘하게 칸막이가 쳐지고 붉은 조명등이 켜진 낮은 건물 앞에서 거의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여자들이 다리를 건들거리거나, 마치 창녀들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천박하게 껌을 씹으며 지나가는 남자들을 불러대는 곳이었다.
-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중     


이렇게 빛나는 초여름의 감동은 점점 풍만을 더한다. 마로니에 공원에 가면 헤르만 헤세가 건네준 감상들을 꺼내 본다. 보라매 공원의 초여름은 연꽃 속에 묘한 아름다움으로 스민다.      


감동하는 삶을 위해

누군가가 나에게 왜 소설 따위(?)를 읽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감동하는 삶’을 위해서라고 답하겠다. 천만 원이 넘는 롤렉스 시계가 선사하는 감동의 ‘시간’을 가지려면 아직 멀었다. 지금 당장 만 오천 원짜리 소설책으로라도 세련되고 풍성한 감동을 얻을 수 있다면, 소설은 그야말로 가성비 갑, 가심비 갑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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